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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과 신하간 의리를 통한 수직적 리더십 갖춰…군을 엄격하게 적용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어떻게 대비 했을까? - ④

감성적 휴머니즘으로 부하와 인간적 관계 맺어…수평소통리더십 구축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23전 23승의 신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그의 출중한 리더십과 신출귀몰한 전략전술과 게릴라 활동을 펼쳤던 의병의 분투, 위민정신으로 민과 관이 하나가 되어 싸웠기 때문에 대승을 거뒀다고 봤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이 전승을 달성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혹시 오래전부터 나름대로 준비를 해온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을 품고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의 여수 행적을 쫓아다녔다. 그가 일기로 남긴 이충무공 진중일기(임기봉 역, 주해․도서출판 범우, 2007)와 난중일기(정희선 역, 사단법인 여수문화원, 1993년)를 토대로 장군도와 좌수영성, 방답진선소, 돌산둔전, 선생원, 석창석보, 곡화목장 등을 둘러봤다. 본지는 이를 토대로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어떻게 대비 했을까?'라는 주제로 기획시리­즈를 마련, 8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잦은 왜구의 침입과 조선의 대비책
2. 장군도와 수중성
3. 진례포와 내례포, 전라좌수영
4. 위민사상과 돌산둔전 방답진 선소
5. 석창석보와 군수물자
6. 수군훈련 어떻게 했나
7. 역참 선생원과 채석장
8. 곡하목장과 군마공급

   
▲ 돌산읍 둔전리 둔전마을 전경
위민사상과 돌산 둔전
조선 관료의 근무 수칙은 군신유의(君臣有義)사상이다. 즉, 임금과 신하 간에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몸에 배어있었다. 왜냐하면 임금은 신하들에게 직책을 하사하고 물질적으로 땅을 주거나 돈(급여) 또는 곡식 등을 주었기 때문이다. 신하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임금의 은혜를 갚기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무과를 급제하여 장군에 오르기까지 평생 무인(武人)의 삶을 살아왔다. 그는 君臣有義를 기초해 부하 장수를 설득했다. 그렇다고 그는 고리타분하고 '나를 따르라'는 식의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 아니다. 부하 장수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이성적, 감성적 소통을 하는데 투자했다. 그의 일기를 보면 당시 엄격한 계급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부하장수들과 함께 활을 쏘며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바둑과 장기를 두는 광경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충무공은 수직적ㆍ수평적 리더십을 융합한 지도력을 발휘한 것이다.

충무공의 리더십을 요약하자면 유비무환(有備無患)과 위민(爲民)정신이다. 유비무환의 정신은 '철저히 준비를 통해 적과 싸워 반드시 이기고 우리의 땅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위민정신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백성에게 일정의 역할을 주어 '함께 싸워 승리를 이루자'는 소위 '투게더(together)'전략이다.

그렇다면 위민정신의 뿌리는 무엇일까? 위민정신은 조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유교와 도학사상이다. 특히 그가 병법에 통달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길러주는 도학사상은 풍수도참사상과도 연결된다. 이순신이 도학사상을 습득했다는 근거는 진중일기에 종종 '도선비결'과 '무학비결'의 문구가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의 지휘관이었지만 '독불장군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관련 책임자와 백성들이 상황을 공유하고 함께 대책을 강구했다. 예컨대 진중일기 1592년 1월 26일자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순천부사와 광양현감 등 두 지휘관들과 방비할 일을 의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비무환․위민정신으로 일본군과 싸워 45전 45승 전대미문의 승리 이뤄
이순신 장군의 유비무환 정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후 그의 행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각종 군기와 군사시설을 점검하고, 검열 결과 관리상태의 부실함이 발견되었을 때는 소속 수군진의 관계자들을 엄중히 처벌했다. 또한 좌수영의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관내에 거주하는 다양한 신분층을 대상으로 수군병력을 확보했으며 전선, 화포 등에 대해서도 철저히 준비했었다.

이러한 유비무환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조일전쟁 7년간 45전 45승이라는 전대미문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게다가 부하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전쟁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은 장군이 직접 보여 준 '솔선수범 형' 리더십을발휘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충무공은 사천해전에서 함선의 갑판 위에 사수들과 함께 활을 쏘다가 어깨에 철환을 맞았으며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뒀던 것도 ‘죽기를 각오하고 앞장서서 싸웠기 때문에 부하들이 도망가지 않고 적을 섬멸했던것이다.

충무공은 임진왜란을 대비할 때 역점을 두었던 또 다른 부분은 좌수영민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거나 치렀던 것이다. 이런 장면은 그의 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예를 들면 임란 초기 경상도의 수군방어체계가 미비한 상황에서 적정(敵情)에 대한 정보입수는 백성에게 주로 의존했다. 적을 처음 맞이하는 옥포해전에서는 적정 파악과 아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바다의 유랑어민들이 탄 포작선을 46척이나 참여시켰다.

또한 한산도 해전 하루 전에는 목동 김천손이 견내량에 있던 적정을 알려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은 조선수군은 물론 좌수영민, 삼남의 백성들과 더불어 적을 맞아 싸웠던 것이다. 민관군 공동방위체제를 구축한 셈이다. 

 둘째,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는데 앞장섰다.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임진년에 경상도에서 여수로 피난해온 난민 300여 명을 수용해야하는데, 여력이 없었다. 우선 임시 거처는 물론 식량을 배급해야 하는데, 당시 조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전라좌수영이 해결해야할 상황이었다. 좌수영의 군수품 조달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정부가 말을 키우던 돌산 둔전에 피난민들이 임시경작을 할 수 있도록 조정에 건의, 허락을 받았다.

이로써 이들 피난민들이 임진년 겨울을 지낼 수 있게 됐다.
 마음이 따뜻한 리더십을 가졌음을 알려주는 장면은 이순신 장군이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지인이 죽었다고 안타깝게 생각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그의 일기에 20차례 등장한다. 엄격할 때는 피도 눈물도 없이 강한 면모를 보였다가도 조요한 달빛을 보고 잠을 이루지 못한 '정이 많은 명장'이었다.

 그렇다면 좌수영민들은 왜 목숨을 걸고 이순신 장군을 추종했을까? 충무공은 이전에 근무한 좌수사의 리더십과는 다른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위민정신이 좌수영민들에게 목숨을 내놓고싸워야 할 '최고의 가치'였을까? 거기엔 뭔가 숨겨진 요인은 없을까? 이에 대해 김충석 여수시장은 색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여수가 당시 순천부로 편입되었고 결국 좌수영민들은 순천과 전라좌수영에 세금 및 부역, 병역 의무 등에서 이중적으로 부담을 지고 있던 상황"이라며 "이순신 장군을 믿고 큰 공을 세우면 여수가 순천부로부터 분리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이는 조선시대 때 여수가 세 번 폐현되었다가 네 번째 복현을 의미하는 '삼현삼파(三縣三破)'사건을 의미한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 5년 되던 해에 "여수 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성문을 굳게 닫고 왕의 사신을 거절한 사건"때문에 여수현을 폐지하고 순천부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여수는 조선 500년간 독립적 행정구역의 지위를 상실했다. 

여수지역민의 고통은 1479년(성종10)에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이후 시작됐다.여수는 순천도호부체제하의 행정지배와 전라좌수영의 군사행정체제하에 놓임으로써 이중적인 지배구조를 받게 되었다.

행정적으로는 순천도호부의 백성이면서 좌수영의 군졸로 소속되는 터라 두 곳의 조세와 군역 등을 부담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고충은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여수지역민들은 불합리한 이중의 지배와 수취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3차례 걸쳐 복현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충무공이 좌수영민들의 고통을 헤아려줬기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전쟁터에 출정, 적을 물리쳤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문위원>
⊙∙임용식 여수시문화원장 ∙
⊙ 김준옥 전남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교수
⊙ 임기봉 좌수영박물관 관장
⊙ 김상우 사)21세기이순신연구회 수석부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황상석 기자  yeosu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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