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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역원제와 여수의 성생원

   
▲ 조선 성종 때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전국 곳곳의 모습을 타임머신을 타고 보듯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여수에 1개의 역과 3개의 원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역원제의 기원은 고려 성종(재위 981~997)때 12목이 설치된 이후 지방제도가 본격적으로 정비되면서 시작되었다.

역원의 기원은 도로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국의 역은 점차로 중앙의 통제 밑에 들게 되었고 개경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역로망을 형성하여 22역도 525역(고려사 병지 역참조)이라는 방대한 역 조직을 갖추게 된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앙과 지방과의 원활한 연락을 위하여 역원제를 두었다. 중앙과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마다 역을 두었는데, 전국적으로 대략 500여 개소의 역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에는 역마(驛馬)와 역정(驛丁)을 두어 공문서를 전달하거나 관리의 왕래, 숙박편의제공, 관물의 수송 그리고 사신의 영접과 접대 등을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기관의 하나이다. 일명 우역(郵驛)이라고 불리 우는 驛院은 행정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각 역에는 찰방이나 역승의 관장하에 역장, 역리, 역졸 등을 두어 공역을 맡게 하였다.

역원(驛院)은 교통 사정이 원활하지 못한 당시에 여행자를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었으나,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도 휴식 및 숙식처를 제공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여수지역에는 몇 개의 역원이 있었을까? 1452(단종 2)의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여수에는 한 개의 역원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32년 뒤 1486년(성종 17)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여수에 "성생원과 무상원(덕양), 내례원 등 3곳에 역원이 있다"고 적혀있다.

이순신 장군은 선생원으로 적고 있으나 조선시대 행정문서에는 성생원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여수지역에 1곳의 역과 3곳의 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즉 덕양역(순천부로부터 동쪽 63리)와 성생원(成生院: 순천부 동쪽 40리), 무상원(無常院: 순천부의 동쪽 65리: 오늘날 무선)과 내례원(內禮院: 순천부서 동쪽 87리: 오늘날 국동 일대와 광무동 석현으로 추정) 등이다.
1770년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순천에서 성생원 40리와 성생원에서 좌수영 40리에 역원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1861년에 편찬된 대동지지에는 "순천에서 성생원까지 40리와 성생원에서 석보창(석창) 20리, 석보창에서 좌수영 20리 등에 역원이 운영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역원제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동을 가져온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성생원은 조선시대 내내 역원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황상석 기자  yeosu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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