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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국 섬 등 외딴 곳에 목장 설치해 방목고대부터 교통ㆍ군사ㆍ축산ㆍ외교 측면에서 말 관리 중시

   
▲ 세조 12년 2월 17일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전라도의 점마별감 박식이 “흥양(오늘날 고흥) 절이도(거금도)는 주위가 2백70리인데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말 8백여필을 방목할 수 있다”고 청원, 목장성을 축성했다.
 고대부터 말은 교통 및 국방 측면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원이었다. 이에 따라 말을 방목하는 목장이 오래전부터 생겨났다. 백제가 패망하기 전에 목장이 170여개소나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특이한 것은 물이 풍부한 섬 지역에 주로 목장이 설치됐다. 그 이유는 호랑이 등 맹수들로부터 말들을 보호하기위해서 섬 또는 외진 곳에 목장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내륙과 섬에 설치되었던 목장에 목감(牧監)과 노자(奴子)를 배치해 직접 마필의 사육에 종사하게 하였다. 또 간수군(看守軍)인 장교와 군인을 배치해 목장을 간수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말 관리는 고대부터 교통·군사·축산·외교상의 필요에 따라 중시되자 전국 각지에 목장이 설치되었다.


조선시대는 국가 중요정책의 하나인 마정(馬政)을 원활하게 지원하고 필요한 말의 번식과 생산을 위해 전국 각 고을의 수초(水草)가 좋은 곳에 많은 수의 목장이 설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 12년 2월 17일에 “전라도의 점마별감 박식이 아뢰기를 (전라)도내의 흥양 절이도(오늘날 고흥 거금도)는 주위가 2백 70리인데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말 8백여 필을 방목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여러 포구의 선군으로서 목장을 수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종 1년(1470)에 사목사 제조가 각지에서 기르는 마소의 숫자를 아뢰는데 절이도에는 364필의 말이 방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사진 1>
조선에는 말 품종의 개발에도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세종대왕에 이르러 토종말과 몽고 중앙아시아의 말을 교배해 오명마(五明馬)이라는 명마를 생산하게 되었다.

문제는 명나라가 이 말을 탐냈다. 결국 매년 1000마리를 조공품으로 명에 바쳐졌는데, 여기에 소요된 말의 공급을 늘리기 위해 목장의 효율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목장이 있는 각 고을 수령에게 그 곳 목장 관리 업무를 겸임했다. 그러다가 1426년(세종 8)에 각 도의 목장 소재지에 ‘말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감목관을 두어 전담했다. 감목관의 직급도 현감 수준으로 예우했다. 1445년에 감목관을 없애고 부근의 수령과 만호(萬戶)를 겸임하게 하였다. 1575년(선조 8)에는 전임의 감목관을 모두 없애고, 그 대신 소재지의 수령이 겸임하게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각 목장의 감목관이 때로는 전임관, 때로는 수령이 겸임해 목장의 관리, 마필 사양과 번식 및 목자의 보호에 힘썼다.
 

우리나라의 목장은 말을 방목하는 방식으로 사육했다. 다만 말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섬 또는 외진 곳에 목장성을 축성, 그 안에 방목을 했다. 목장성이 원형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고흥군 거금도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절이도 목장성’으로 불렀다. 오늘날 금산면 어전리와 석정리 일대에 위치하는데 이 성은 적대봉과 용두봉의 중간 계곡을 형성하는 부분에 남북방향으로 축성된 장성이다. 이 목장성의 길이는 석축의 유적이 확인된 것으로 4,652m에 이르며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의 규모였다. 체성축조방법은 내벽의 경우 먼저 바닥에 잡석을 깔고 그 위로 너비 30-80cm, 두께 20-60cm크기의 부정형 활석으로 80cm까지는 막쌓기를 하였으며 그 위로 판석형 석재를 사용하여 열을 맞추었고 비교적 성돌의 정연한 면을 바깥쪽으로 하여 성벽의 전체 면이 고르게 축조하였다. 이처럼 목장 유적의 역사적 의미가 큰데다가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함에도 불구하고 관련 연구가 부족하다.

황상석 기자  yeosu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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