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수 선원동에 위치한 연세약국 김정환 약사가 자신의 약국 안쪽에 마련된 악기 제작공방에서 자신이 만든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 기회는 늘 찾아온다. 부단한 노력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자수성가형의 노력파가 있는 가하면 운이 좋아 호재의 기회를 맞는 이들도 있다. 기회는 주변의 여러 경로를 통해 주어지기도 하지만 때론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카르페디엠(carpe diem).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의 이 라틴어는 지금 충실하지 않고 준비없이 보낸다면 다가올 기회는 영원히 잡울 수 없다는 교훈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타미플루, 자궁경부암 유발 바이러스 치료 물질 발명 특허 '선행기술조사연구' 마쳐
해마다 의료봉사 빼놓지 않고 챙겨...첼로 제작 통해 인생의 소중함 깨닳아

선원동 연세약국을 운영하는 김정환 약사(45).

더벅머리에 네모랗고 큰 안경. 수수한 차림새를 한 김 씨는 세계 최초로 인유두종바이러스(HPV)를 부작용이 없이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조성물을 발명한 장본인이다.

그는 작년 10월 신종플루의 치료제인 타미플루의 성분인 오셀타미비르를 포함하는 '인유두종바이러스 치료용 약학적 조성물 특허'를 세계최초로  냈다.

그는 세계적 논문잡지 ‘네이쳐’ 논문발표를 준비하고 있으며, 오셀타미비르 제조가 가능한 글로벌 제약회사 스위스 ‘로슈’사와의 특허 판매 계약도 현재 추진 중이다.

HPV 바이러스는 여성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주요 바이러스.  이 바이러스의 종류는 100여가지에 달하는데 인체의 모든 피부에 발병한다.

여성의 경우 자궁이 이 바이러스에 취약해 자궁경부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바이러스의 치료는 그동안 냉동치료법이나 주사요법으로 행해져 왔는데 통증과 흉터 등의 부작용이 따랐다.  현재 시판중인 자궁경부암 예방약인 ‘가다실’은 국내 200억 규모의 시장이 형성돼있을 만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발작, 두통, 가슴 통증 등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아 신약 발명이 절실한 실정이다.

김 씨의 특허가 신약으로 개발되면 연고나 복용만으로도 자궁경부암의 치료가 가능해진다.

김 씨에게 기회는 뜻하지 않게 불행과 함께 찾아왔다.

신종플루가 전국을 강타한 지난 2009년. 신종플루 진단을 받은 것이 화근이 됐다. 약국을 방문한 감기환자로부터 감염됐을 것으로 추정했을 뿐 정확한 원인도 몰랐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고, 어느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순천의 한 종합병원으로 긴급히 후송됐다. 사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고, 코마(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급기야 심정지가 왔고 수차례의 심폐소생술까지 했다.

평온했던 그의 삶은 한순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생사의 기로에 섰다. 

국내에서 가용한 거의 대부분의 독감 바이러스 치료제를 동원했다. 의료진조차 어렵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늘의 뜻이었을까. 수일을 중환자실에서 산송장처럼 묶여 꼼짝 못한 채 집중 치료를 받은 끝에 그는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며칠 후 그는 신기하게도 손에 난 사마귀가 다 떨어져 나간 것을 확인했다. 두어달 지나자 사마귀가 다시 자란 것을 보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치료차트를 입수한 후 투약했던 타미플루가 사마귀를 제거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타미플루를 물에 타 사마귀에 발랐더니 실제 효과를 보였고, 그의 가설은 사실로 입증됐다.

곧바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실험에 들어갔다. 사마귀가 생긴 지 오래된 것일수록 효과가 더 높다는 사실도 깨닳았다.

타미플루 약제가 DNA 사슬 중 텔로메어(말단)를 먼저 공격한다는 가설을 세웠는데 노쇠한 DNA를 먼저 죽이게 되는 원리라고 설명했다.

세계 최초로 HPV바이러스를 획기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물질을 발견하고 특허를 냈지만 실제 여성의 자궁경부암을 획기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가를 입증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신약 개발을 위해서는 바이러스의 실체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하는데 국내에는 바이러스 전문 연구기관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물론 임상실험도 할 수 없고요”

“말로는 의료강국이라고 하지만 에볼라, 메르스 등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 한군데도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인데 암담하지 않겠어요”

그는 현재 HPV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을 위한 ‘선행기술조사 연구’까지 마친 상태다.

이는 특허출원을 받기 위한 사전단계의 조사로서 기술에 대해 타인이 특허출원을 하지 못하도록 원천권리를 보장해주는 국제 특허 규약이다.

김 씨가 혼자만의 열정과 노력만으로 여기까지 오기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약사로 일생을 전념한 아버지의 도움이 컸다.

삶과 죽음을 오간 찰나 속에서 얻은 값진 인생의 선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생각해주는 계기였다고 그는 겸손함을 표한다.

“특허를 출원한 것은 분명 저에게 찾아온 큰 행운이지만 지금 제 삶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새로운 삶을 얻게 된 후로 제 자신과 가족, 주변의 소중함을 깨닳고, 언제 죽을지 모를 삶에 더욱 많은 애착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는 해마다 실시하고 있는 해외 의료 봉사도 거르지 않고 있다. 어려운 이들이 있으면 측은지심이 들고 돕고 싶은 생각도 크다. 자연히 주변을 둘러보는 혜안도 커졌다고 했다.

순천의 한 종합병원 약사로 근무하는 아버지를 보고자란 덕분에 약학을 전공했지만  그의 가슴은 늘 예술혼의 열정이 불타오른다.

20년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대형 카메라로 사진의 세계에 몰두했고, 개인전시회도 수차례 가졌을 만큼 사진예술계에서는 정평 나있다.

예술인들 사이에선 알버트 김(Albert Kim)이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통한다.

“디지털 시대가 지나면 다시 아날로그 시대가 올 것입니다.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날로그의 감성과 따뜻함은 결코 디지털로 흉내낼 수 없는 영역입니다.

‘린호프’. 당시 족히 왠만한 집한 채 값 했을 이 대형 사진기를 직접 촬영하고 인화하면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과감없이 표현했다. 사진을 통해 만나게 된 아내와의 각별한 사연도 소개했다.

병상에서 일어난 이후로는 새로운 일에도 몰두하고 있다. 학창시절 고악기 감정에 관심이 있었는데, 숨은 재능을 살려 첼로와 바이올린 등의 현악기를  직접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베를린과 로마, 뉴욕, 런던, 프놈펜, 마드리드 등 전 세계 각지의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악기 제작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태리에 스승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그는 나무 고유의 재질과 악기형태의 조각, 바니쉬작업 등 인간의 손길을 통해 탄생하는 악기가 내뿜는 음의 깊이와 색깔에 감탄한다.

취미로 첼로를 28년 동안 연주했다던 그는 얼마전 완성한 첫 작품을 연주하며 큰 자부심을 느꼈다 .

1만명의 회원이 가입된 국내 최대 첼로 모임 카페 ‘뒤포르의 첼로카페’ 매니저도 맡을 만큼 열정적이다. 특히 그는 뒤포르 장학재단을 운영,  캄보디아 학생 지원과 교수진을 매년 파견해 영재발굴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 인생에 있어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새 삶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지금껏 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서 성공도 실패도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시간은 절대 헛되이 보내지 마세요. 당신이 헛되이 보낸 일분일초는 세상을 떠난 누군가가 그토록 갈망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조승화 기자  frine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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