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대째 멸치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강일식(39) 씨 부자. 매일 이른 아침이면 강 씨 부자는 수협 경매장에 나선다. 구매한 멸치의 신선도를 확인하고 있다.

가업의 전통이 사라져가는 요즘, 4대째 멸치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집안이 있어 화제다. 올해 중매인 경력 2년차의 강일식(39)씨. 그는 동이 트기 전 이른 아침이면 어김없이 베테랑 중매인인 아버지와 경매장에 나선다.

가업의 대를 잇기 위해 중매인 수업을 한창 받고 있다는 그는 직장인으로 치자면 새내기 말단 직원에 불과하다. 낙찰받은 물건을 나르는 등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 그는 “이런 일은 부지런함이 생명”이라며 숨 돌릴 겨를 없이 바삐 움직였다.

강 씨의 집안은 4대째 멸치와 오랜 인연을 맺고 가업으로 승계하고 있다.

‘자신도 멸치 중매업을 하게 될지 몰랐다’는 그는 대학을 나와 여수산단에서 번듯한 직장을 잡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던 그의 운명도 멸치와의 인연의 끈을 외면하지 못했다.

직장생활보다 고되고 힘들지만 하나하나 배워 나갈 때 느끼는 성취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강 씨가 집안일을 물려받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버지가 6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가업이 어려워지자 다니던 회사를 과감히 그만두고 일을 배우겠다 자처했다.

전통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가업승계 아카데미 교육을 받는 등 집안을 일으키기 위한 투지와 열정은 넘쳤다.

하루에도 수십여 박스의 말린 멸치와 씨름하다 보니 몸에는 비릿내가 가실 날이 없지만 그에게는 언제 맡아도 향긋하고 구수한 냄새다.

성치 않은 몸에도 매일 아들과 함께 공판장에 나서는 아버지 강영갑(68) 옹은 멸치 소매업만 50년 경력.

아들 일식 씨에게 그런 아버지는 멘토이자 선생님 같은 존재다.

“멸치는 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못 배워. 손해도 보고, 횡재도 한 번씩 해봐야 실력이 하나하나 느는거여. 공부 배우 듯 배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이 바닥에서 48년 몸담은 나도 가끔 아차 할 때가 많은데 초짜들이야 오죽하겠나”

“자식들이 공부로 성공하길 바랬제. 멸치는 전수하고 싶지 않았어. 워낙 힘든께. 그래도 자식들 가운데 일식이가 가장 장사꾼 기질이 탁월한께 가르치려고”

예나 지금이나 일식 씨는 아버지에게 효자 아들이었다.

아들 일식 씨는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아버지가 밤늦게 돌아오시는 걸 보고 마음이 언짢았다”면서 “학창 시절도 그렇고 군복무 시절에도 휴가 때마다 집안일을 도왔다”며 옛추억을 떠올렸다.

매일 아침 사들인 멸치의 입출고와 관리는 일식 씨의 몫이다. 아버지가 장부에 수기로 작성하던 것을 전산화했다. 그런 덕에 어느 정도 체계도 잡혀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구매는 아버지가 전담하고 있다. 일식 씨가 쉽게 넘볼 수 없는 영역이다.

멸치를 고르는 안목과 수급에 따라 많은 수익을 남길 수도 있지만 낭패를 보는 일도 다반사이기 때문.

1만원 짜리를 1만5000원에 대량 구매한 적도 있고, 수요계산을 잘못해서 재고가 되기도 한다.

사실 멸치만큼 품종이 다양한 물고기도 없다. 품질, 크기, 용도별로 수십, 수백여 가지에 이른다.

강 씨는 직장생활에서 배운 재고관리를 토대로 멸치 규격을 정형화 해 체계적으로 관리해 보려 노력했으나 불가능에 가까워 포기했다고 했다.

농산물과 달리 생산량 예측이 되지 않는 점도 재고관리가 어려운 이유다.

“멸치는 건조 과정에서의 통풍이 중요합니다. 잘 마른 멸치는 황금색으로 변하는데 이것에 따라 품질이 결정된다 보시면 됩니다. 설명도 어렵고 그저 몸으로 부딪히며 배워야 하는데 몇 년 만에 쌓을 수 있는 기술이 아니죠. 그런 물정을 모르고 규격화하겠다한 생각 자체가 우스웠던 거죠”

특히 크기 구분이 어려웠다. 거래처에서 주문한 ‘고바’ 멸치를 보냈는데 너무 크다며 항의를 받기일도 부지기수였다.

“몇 년 전 멸치박스를 밟고 물건을 내리다 아버지에게 된통 혼난 적이 있습니다. 한 상자에 10만원을 호가하는 죽방멸치였는데 그런 사실도 모르고 함부로 다뤘으니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멸치를 잘 알지 못해 겪는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강 씨 집안이 멸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증조부가 남해에서 정치망을 하면서부터다.

할아버지가 여수로 와서 정치망 어업을 이어받았고, 아버지가 씨가 20대 초반 젊은 나이 중매일에 뛰어들었다.

“지금이야 수협에서 다 위탁판매를 해주지만 당시만 해도 수협이란게 없던 시절이여. ‘보부상’이라고…개인이 위탁 판매물건을 받아 팔던 점포를 운영했제. 인부가 4명이나 됐은께 꽤 잘나간 편이제”

아버지 강영갑 옹은 약 50년 전을 회상했다.

“그때만 해도 멸치가 넘쳐났어. 지금보다 생산량이 못해도 3배는 될거여. 최고의 명절선물이었고, 애들 도시락이며 각종 요리에도 멸치는 빠진 적이 없었제. 약방의 감초였지”

“냉동창고도 없었고 은행 문턱도 높았어. 멸치를 그때그때 팔아 수금한 돈을 멸치포대에 넣어 짊어지고 다닐 정도였은께 경기가 무척 좋았지”

강 씨 부자에 따르면 멸치 생산량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다. 남획으로 인한 자원고갈이 주된 이유지만 지구온난화도 한몫했다.

강 씨는 “아버지가 한창 시절 일본에 100만 상자를 수출할 만큼 거래처가 많았다”면서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많은 거래처를 잃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수출이나 SNS를 통한 온라인판매, 복지몰, 오픈몰 등 판매루트 개척에 몰두하고 있다.

일식씨는 끝으로 “시대가 지나도 소비시장이 꾸준히 유지된다는 게 멸치의 경쟁력”이라며 “아버지는 바라지 않지만 저는 멸치가업을 자손대대로 물려주고 싶다”고 전했다.

조승화 기자  frine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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