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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기틀을 다진 정책추진자, ‘이사’데스크칼럼> 김현석 편집국장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들여다보는 데는 꼭 여러사람을 분석해 봐야 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다. 단 한 명의 최고지도자, 단 한 명의 최측근 참모만 집중해서 검증해 보아도 충분하다.

이 중에는 얼떨결에 정책결정자의 위치에 올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조차를 모르고 있다거나, 시류에 편승해 권력의 자리에 올라 정세가 급변할 때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물쭈물, 우왕좌왕, 갈짓 자 행태를 보이고 마는 정책결정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정책결정자에게 확고하고도 일관된 어떤 철학이 있느냐이다. 이왕이면 그 일관된 철학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느냐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정치지도자가 연출하는 이미지에 현혹돼 정작 그 지도자의 철학이나 성향 등이 무엇인지 꼼꼼히 따져보는 노력은 소홀히 한다. 또 습관적으로 정치의 옳고 그름을 따져보기는 하지만 실제 우리의 기대에 부합되어 그 정책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경험해 왔다.

다음은 일관된 정치철학을 가진 정책결정자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막대하게 끼쳤는가를 알게 해 주는 한 대목이다. 물론 그 철학의 내용에 대해 우리가 얼마만큼 동의하느냐는 별개로 하고.

춘추전국시대 순자에게서 수학한 초나라 상채 출신 ‘이사’는 진나라가 천하통일의 대세로 자리잡은 것을 직감하고 이를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스승 순자에게서 배운 제왕의 기술을 십분 발휘해낸 사람이었다.

순자는 맹자와 함께 공자학설을 전파한 사람으로 50세에 제나라 ‘직하학궁’에 갔으며 제나라 양왕 때에는 세차례나 좨주를 지냈다. 직하학궁은 제 선왕이 천하의 내로라 하는 현사들을 불러모은 곳으로 전국시대 제자백가들이 구름처럼 몰려 자유롭게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이곳 직하학궁에 전국의 인재들이 몰려든 이유는 출신나라를 따지지 않고 개방한 데다 수학자들에게 숙소와 생활비까지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학문이 크게 번성한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당연지사였다.

순자는 공자의 ‘인’ 학설을 계승한 맹자와는 달리 공자의 ‘예악’사상을 계승했다. 순자가 선택한 예악사상은 인간의 외재적인 면을 강조한 이른바 성악설로 인간의 본성은 약하므로 ‘작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위’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뜻으로 ‘人인(人)’과 ‘爲위(爲)’가 합성한 말이다.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을 의미하고 있다.

순자는 ‘위’의 극치가 ‘예의(禮義)’이고 이 예의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으로 보았다. 이는 인간의 내재적인 면을 강조한 맹자의 ‘인’, 즉 성선설과는 대조되는 관점으로 ‘의(義)’를 중시하고 ‘利리(利)’를 경시한 맹자와는 크게 달랐다. 흔히 맹자가 ‘王道왕도(王道)’를, 순자가 ‘覇道패도(覇道)’를 숭상했던 이유를 알게 해 준다.

따라서 순자는 도덕에 의한 통치보다는 ‘예’에 의한 통치를 이상적인 통일국가의 운영 원리로 제시했다. 순자에 따르면 예에 기초한 사회는 실제와 명분이 하나로 통합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고 이를 ‘정명(正名)’이라 칭했다. 이 정명의 원칙은 후에 제도혁명을 추진하는 통일 진나라의 기본원리가 되었다.

순자의 정명을 유세논리로 무장한 초나라 출신 ‘이사’는 아직 시황제의 칭호를 얻기 전인 진왕 ‘정’을 찾아가 “지금이 만년에 한 번 있는 기회”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정통성 논란을 겪고 있던 왕의 마음을 흔들었다. 왕은 이사를 궁궐 일을 총괄하는 장사(長史)로 임명하고 막강한 권력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최측근으로 등극한 이사는 한 손에는 선물을,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동반자들을 포섭해 나가면서 이에 대항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제거했다. 이런 공로로 객경(客卿)'의 자리로 승진하는 탄탄대로를 걷게된다.

하지만 도드라진 자리에 오른 자는 그 위치 때문에 쉽게 수많은 정적들의 표적이 된다. 이사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둘러싼 논란에 휩싸여 정적들의 살생부에 이름이 기재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정적들은 초나라 출신 이사가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고 맞선 것이다. 모두가 진시황의 결정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이사는 긴 상소문을 통해 나라의 강성은 인재를 개방해 활용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진나라 효공이 상앙의 변법을 채택해 나라를 부강하게 했으며, 혜왕은 장의의 계책을 받아들여 삼천의 땅을 차지했고, 소왕은 범저를 얻어서 외척과 대신들의 득세를 막을 수 있었다는 등 이 모든 대업들이 다른 나라 출신들의 인재들을 통해서 이뤘다는 것이다.

실제 진시황이 갖고 있던 진귀한 보물인 화씨벽과 명월주, 섬리의 준마, 명검 태아, 취봉의 旗, 영타의 북, 그리고 완주의 비녀, 아호의 옷, 금수의 장식, 부귀의 귀걸이 등은 모두 진나라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나라의 것은 보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나라 황제가 천하를 얻어 부국강성에 아를 수 있었던 것은 이사의 주장대로 인재론과 용인술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했다.

진시황의 총애를 입은 이사는 통일제국 진나라의 법과 행정을 뜯어 고치는 일에 앞장섰다. 원활한 세금징수를 위해 전국에 도로를 개설하고, 화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표준화하고, 문자를 통일하여 흩어진 문화재를 재편하고, 윤리도덕 시행, 중앙관리를 파견하는 유관제도 도입 등을 통해 불과 십년 이내에 진 제국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변모시켰다.

복속된 국가들의 거센 반발도 있었지만 황제의 최측근 이사는 칼과 도끼를 휘두르는 비타협적인 법가의 정신을 발휘해 중앙으로부터 떨어진 먼 지방에까지 법이 동일하게 미치도록 제도화 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이 하나의 통일국가로 나아가게 된 시발점은 진한의 통일에서부터이며, 이는 불과 10년 만에 이룩한 진시황의 천하통일이 그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이같은 역사적 업적속에는 당시 정책추진자였던 ‘이사’의 족적이 빼곡하게 녹아들어있다.

정책추진자의 일관된 정치철학이 얼마나 막대한 결과를 낳는지를 웅변해 주는 역사기록이 아닐 수 없다.

김현석 기자  arguskim@outloo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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