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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소고…헌법과 국회법을 중심으로창간 23주년, 데스크에서… 김현석 편집국장

지금 2,30대 청년들이 들으면 놀라겠지만 우리나라는 정·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를 운영해 본 국가다. 헌법도 9차례나 개정했다. 올해 촛불정국을 통해 탄생한 정부도 현 헌법 체제 하에서만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헌법을 벗어날 수 없고, 민주적 운영은 그 헌법의 민주적 정당성과 절차를 통해서 완성된다.

지난 8월 23일 여의도 국회에서는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전체회의 가 열렸다. 1987년 체제의 현행 헌법을 뛰어 넘자는 의도다. 헌법 개정은 단순히 법을 고치는 문제로 끝나는 건 아니다. 사회구조개혁이나 권력구조 개혁과도 맞닿아 있다. 종국에는 우리 실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국회에서 논의 중인 헌법 개정 일정에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본지 지면 발행 23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의 헌법 개정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1948년 7월 12일 개정하여 17일 공포한 대한민국 헌법은 불과 32년 만에 8번이나 개헌하였고, 1987년 9번째로 여야 합의해 의해 시행된 임기 5년의 대통령직선제도 그 권력구조의 폐해 때문에 매번 레임덕에 직면했고 정권말기에는 부패스캔들을 양산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따른 임기문제와 부정부패, 비리 등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4년 중임제 도입이나 이원집정부제, 의원내각제 등의 권력구조 개편을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헌법이 탄생

1945년 8월15일은 대한민국 삼천리강산이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역사적인 환호의 순간이었으나 이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이유로 진입한 미·소로 인해 한반도는 다시 남과 북이 북위 38선으로 갈리는 불운을 맞게 된다.

서울 덕수궁에서 열리던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소련의 반대로 결렬되기 전·후의 해방정국은 그야말로 혼돈의 연속이었다. 대구폭동사건, 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철도파업이 일어났고 민족의 지도자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 선산 장덕수 선생이 차례로 암살당하였다. 친탁이냐 반탁이냐를 기준으로 좌·우익이 나뉘어 혈투를 벌리는 극심한 혼란 정국에 빠져들었다.

1948년 5월10일, UN은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군정을 종식하고 통일 독립정부를 구성하려고 UN한국위원단 활동을 개시했으나 38선 이북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의 반대로 일단 미군정 체제하에 있던 남한 단독으로 민주적 절차를 진행하였다. 이에 남한에서는 이 결정에 반대하는 남로당의 극렬한 투쟁이 전개되었고 제주 4·3항쟁이라는 비극적 사건도 맞게 된다.

당해 치러진 5월10일 총선은 제헌국회가 됐다. 의회는 국가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태극기와 애국가를 확정했다. 이 제헌의회에서 그 유명한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이다(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2조)”로 시작하는 헌법 전문이 국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헌법은 제2장 국민의 권리의무, 제3장 국회, 제4장 정부, 제5장 법원, 제6장 경제, 제7장 재정, 제8장 지방자치, 제9장 헌법 개정, 제10장 부칙 등 전체 103조로 구성돼 새 나라의 기틀을 담았다. 이 헌법에 제시한 권력구조 핵심은 대통령중심제에 내각책임제를 가미한 형태였다. 7월17일 국회의장 이름으로 공포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여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 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구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해공 신익희를 국회의장으로, 대통령은 우남 이승만, 부통령 성제 이시형을 선출하였다. 대법원장에는 가인 김병로가 임명되었고 입법·사법·행정 3부가 구성돼 8월1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10월19일 저녁,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 병사들이 제주출병을 거부하고 사건을 일으켜 민족사의 또 하나의 비극인 여·순사건, 혹은 여·순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 지역은 수많은 민간인, 군인, 경찰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적 상황을 겪게 되고 숙군파동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UN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게 되었지만 다음해 6월26일에는 통일정부 수립을 소원했던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이 육군 소위 안두휘에 의해 암살당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 천인공노할 비극에 삼천만이 통곡했다.

제1차 개헌은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인 6.25전쟁 중에 피난수도 부산에서 일어났다.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이 터져 민심이 흉흉하던 즈음이었고 헌법전문이 공포된 지 4년이 지난 해였다.

7월7일, 속칭 발췌개헌으로 불리는 이 개헌은 제2대 국회에서 비정상적으로 추진되었다.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려는 의원들 때문에 재선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상한 이승만 대통령은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원들이 탄 버스를 끌고 갔다. 이 개헌으로 정·부통령직선제가 도입되고 국회는 양원제(민의원,참의원)로,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제도를 기립투표로 개헌하여 직선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였고 송암 함태영이 3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제2차 개헌은 단기 4287년 11월29일에 있었다. 목표는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것. 그의 영구집권의 길을 터주기 위해 대통령 중임 제한을 폐지하고 동시에 대통령 권한을 강화했다. 국무총리 폐지, 국민투표제 도입, 사유 사영의 경제원칙 등을 골자로 ‘사사오입’이라는 창의적(혹은 무대포) 방식으로 법안을 처리하였다.

제3차 개헌. 단기 4293년 11월29일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허정 내각이 과도 정부를 구성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국회에서는 대통령의 독재를 막아야 한다는 국민들의 여론을 의식해 6월15일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추진한다.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원수로만 두고 실권은 국무총리에게 있게 했다. 또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허가 검열제 금지, 복수 정당제 보장, 헌법재판소 설치, 지방자치제도 실시 등 민주적 절차와 공간을 확장하는 개정이 이뤄졌다. 7·29 총선에서는 국회가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뉘어 선출되었다. 여기서 대통령은 윤보선, 국무총리는 장면이 선출된다. 의원내각제의 제2공화국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장면 내각은 무정부상태인 정국 혼란을 수습하면서 학사경찰제도를 도입과 사법권의 민주화 개선 등 국민의 권리 확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등장할 때도 이때였다.

제4차 개헌은 4·19 부상자들의 국회의장석 점거 등 사회여론에 따라, 3·15부정선거 주모자들과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 부정축제특별처리법,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조직법 등을 제정하기 위해 11월29일 소급입법으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단기 4294년 5월16일,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혼란과 무질서를 극복하고 사회질서도 서서히 안정되어 가고 있던 집권 9개월 즈음, 헌정이 유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발하게 된다. 박정희 소장을 따르는 소수 군인들은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구실로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시작으로 국가재건최고위원회에서 군정을 실시한다. 이때부터는 오랫동안 써오던 단기 대신 서기를 쓰게 됐다.

제5차 개헌.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2월26일 내각책임제의 제2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부통령을 없애고, 헌법재판소도 폐지하고, 대통령 중임제를 바탕으로 국회는 단원제로 바꿨다.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제 채택, 가·부동수일 때에는 부결된 것으로 본다는 등을 골자로 한 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전문개정하였다.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제3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제6차 개헌은 또 권력구조 개편을 목표로 한 악의 한 수로 처리되었다. 이승만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는 역사적 교훈과 뜻있는 국민들의 여론을 무시한 채 개헌안이 무리수로 진행됐다.

3선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의원 정수 상한을 250명으로 확대하고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개헌안을 준비하고 1969년 10월21일 새벽 2시에, 민주공화당 의원들만 제3별관에 극비리에 모이게 한 다음 단 2분 만에 헌법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 헌법에 따라 71년 박정희 후보는 김대중 후보를 이기고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 3선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갖게 됐다.

제7차 개헌. 1972년 10월, 정기국회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데도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적 민주주의 실현을 명분으로 계엄령 하의 8대 국회를 1년 3개월 만에 해산시키고, 각종 정치활동을 중단시키는 10월 유신을 감행했다. 헌법 개정에 대한 찬반 논의도 못하게 하면서 1972년 12월27일 대통령직선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하고, 횟수에 제한 없이 영구집권이 가능하게 했다.

게다가 법관 임명권, 국회의원 일부 선출권, 국회해산권 등 입법·행정·사법까지 대통령의 권한이 집중되도록 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은 제한하는 전문개정을 성사시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는 소위 10월 유신 헌법을 제정했다.

이 무렵 북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를 ‘평양이다’로 고쳐 개헌했다. 남한의 박정희와 북한의 김일성이 영구집권을 위한 적대적 공존의 관계로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제8차 개헌 추진 조짐은 1979년 10월26일 대통령 박정희의 급작스런 변고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있을 때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전두환 장군을 따르는 소수의 군인들은 12월12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최규하를 끌어내리려 했다.

쿠데타에 성공한 신군부는 민주화를 외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짓밟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만들어 사임한 최규하에 이어 11대 대통령으로 전두환을 당선시켰다. 1980년 10월27일에는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대통령선거인단에서 선출하게 하고,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환경권, 행복추구권 신설, 연좌제 폐지, 4·19와 5·16계승을 폐지하는 내용의 전문개정이 통과돼 전두환은 소원대로 12대 대통령이 된다.

제9차 개헌. 1987년 6월29일 신군부의 핵심세력이자 전두환의 후임자였던 노태우는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져오던 ‘호헌철폐! 독재타도!’ 함성에 굴복해 직선제개헌안을 받아들이는 선언을 하게 된다. 이에 여·야는 10월29일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통령 임기 5년 단임제, 대통령 선출은 직선제로, 국회 국정감사권 부활, 헌법재판소를 제6장으로 신설하는 등의 전문개정에 합의하게 이른다.

역사에서 경험한 권력구조의 장·단점을 살펴보면

먼저 정·부통령제를 살펴보자. 제1공화국 12년 동안 초대 이시영, 2대 김성수, 3대 함태영, 4대 장면 부통령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카리스마에 눌려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노령으로 후계자를 염려한 자유당은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면서까지 두 번이나 국회의장을 지낸 만송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4.19학생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무소불위의 자유당 천하였던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당시 해방정국이었던 남한은 전기가 끊기고 경제는 밑바닥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건국을 알린 대한민국은 다들 경험이 전무한 자들의 천하였다.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나, 행정공무원, 군인, 경찰, 교사 등 모두가 새 나라를 건설하고 운영하는데는 그 전문성이 턱없이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으로 국토는 잿더미가 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기아가 극심해 져 갔다. 국가 재건과 부흥, 교육에 힘을 쏟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음은 내각책임제로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이 9개월 동안 운영했던 제도다. 민의원과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면 이 대통령은 국가의 수반으로 국무총리를 지명한다. 국무총리는 국회의 선출을 받으면 그때부터 실질적인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한다. 제2공화국은 7.29총선에서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민의원과 참의원을 석권한 민주당이 구파인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그러자 민주당 신파는 국무총리로 지명된 구파 김도연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신파와 구파의 대결은 점차 격렬해 졌다. 이윽고 민주당 구파는 신파인 장면이 국무총리로 지명돼 투표에서 선출되자 당을 박차고 나가 신민당을 창당했다. 국민들은 실망했고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정부는 여러 시책들을 통해 정국 안정을 꾀했고 사회분위기도 차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그러나 박정희를 필두로 한 소수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헌정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법이 유린되는 암흑의 역사가 전개된다.

국회와 대통령은 왜 사랑받지 못했나

현행 헌법은 1987년 여·야 합의로 개정한 체제다. 이후 6명의 대통령이 선출됐으나 대부분 그 정권의 말기는 불행했다.

이유는 헌법에서 정한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은 국회라는 민의의 전당에서 건강한 비판과 대안제시, 견제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제왕적 대통령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헌법 제8조, 40조, 44조, 46조, 54조, 61조, 63조, 65조, 66조, 68조, 70조, 71조, 84조, 86조, 87조 등에 나와 있는 정당, 국회, 국회의원,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권한과 의무를 명확히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헌법과 국회법을 비롯한 각종 법률이 잘 못 만들어져서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법, 토론문화, 참모회의를 통해서 사업을 계획하면 치열한 토론을 거쳐 장·단점과 문제점을 파악하여 해소책까지 완비한 후에 결정하고, 일단 결정이 나면 일사분란하게 조직적으로 추진하는 게 부족했다. 이러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투명하지 못했던 공천권 남용이 국회와 국가를 위기에 몰아

해방이후 보스에 의해 수 없이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나라 정당발전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70여년이나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당내에서조차 의제를 정하고 순서에 따라 토론을 통해 의사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민주질서를 찾아보기 어렵다.

국회가 국민들의 뜻을 받아들여 해결해야 함에도 걸핏하면 거리로 나가기 일쑤였고 계파대립을 스스로 조정하지도 못해 조정자를 아예 외부에서 모셔오거나, 또 당이 비정상적일정도로 오랜기간 비상대책위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대한민국 국회가 앞으로도 이런 비정상적인 당 운영을 ‘일상적’으로 보여준다면 그야말로 헌법 개정을 통한 사회구조 개혁이나 권력구조 개편은 언감생심으로 남을 뿐. 오히려 국회무용론이나 국회의원 특권 발탁 등과 같은 국민적 저항에 맞닥뜨리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개헌을 해야 한다면 국회의원 수를 대폭 줄이고 국회의원 특권들도 축소하는 소수 정예의 단원제로 가든지, 아니면 민의원·참의원 양원제로 하되 합동회의를 할 때는 부통령이 의장이 되도록 하는 의회민주주의 선진국 사례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구 국회의원과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비율도 재검토하되, 공천을 투명하게 하면서 전문성을 갖춘 비례대표 수를 늘이는 방안이다. 단, 비례대표 의원은 단 1회에 한해 선출되도록 하고. 현행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개정하여 지방의 사업과 예산은 정부와 지자체·지방의회에 맡기고, 국회의원은 국가적 차원에서 지방사업과 예산이 지역균형과 특색에 맞게 합리적으로 편성 집행하게 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쪽지 예산은 법으로 막아야 한다.

국회법 제65조2 인사청문회법에 의한 인사청문회는 지나치게 지명 후보자의 온갖 약점을 들춰내 망신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므로 이를 세련된 방식의 절차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 헌법 제78조는 인사권은 대통령에 있고 국회는 헌법 제63조 해임권과 제65조 탄핵소추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책임제이므로 대통령이 책임지고 신속히 임명하여 국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인사청문회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헌법정신에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19대 국회 이후 교섭단체대표들의 합의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 식물국회로 만드는 국회선진화법도 위헌논란을 낳고 있으니 폐지하면 좋을 듯 하고, 국회법 제106조2의 무제한 토론, 일명 ‘필리버스터’도 문제다. 반대하는 안건 통과를 저지하기 위하여 단상에서 안건과 상관없는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끄는 행동들이 과연 지금 시대에 맞느냐는 것이다.

이 외에도 국회의원 주민소환제 도입, 국회의장의 독선을 막기 위한 의장 공소권제도 도입, 경제민주화법 강화, 교육제도개선특별위원회 신설, 방산비리 특별법 제정 등도 검토해 볼만하다는 여론이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29일부터 전국을 순회하는 ‘헌법개정 국민대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전국 16개 시·도를 한 달간 돌며 토론회를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토론회에서는 국민기본권보장 강화와 정부형태 개편, 지방분권 강화 등의 주제로 대화가 이뤄진다고 한다. 87년 체제를 뛰어넘는 새 헌법이 탄생되도록 국민들의 관심과 열망이 확산되면 좋겠다.

(이번 칼럼은 여수시 민선3기·5기 시장과 ‘한국회의법학회’ 회장을 역임하신 금산 김충석 시장님과의 대담을 정리한 글입니다. 김충석 전 시장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김현석 기자  arguskim@outloo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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