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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인 상황 속 우발적 사건 여순사건 - 이태, 실록소설 『여순병란』문학칼럼> 순천대학교 송은정

1948년 10월 19일 발발했던 ‘여수·순천 10·19사건’이 내년이면 70주년에 접어든다.

광복 이후 찬탁·반탁으로 대변되는 좌우갈등은 7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진행형으로 보인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거부했던 세력들에게 명명된 ‘좌익’은 정부 수립 이후 ‘빨갱이’, ‘좌파’, ‘종북’으로 낙인찍힌 이후 요즘도 정치적 상황들 속에서 기득권에 반대한 이들을 탄압하는 만능 키워드로 쓰이고 있다.

특히 ‘빨갱이’는 하나의 정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그 용어에서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는 섬뜩함의 유래를 김득중은 여순사건 김득중(2015), 『빨갱이의 탄생』, 선인, 46~47쪽

에서 찾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낱말이 정치적 지향을 일컫는 것에 반하여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적 존재로 멸시하는 용어였다.

빨갱이를 한 하늘에서는 함께 살 수 없는 악의 존재로 여기게 되고, 많은 지역민들이 사건의 가담여부를 떠나 빨갱이로 의심되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국가권력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 맘 때면 괴기(생선)가 금값이여.”

방송 취재를 나가서 들었던 말이다. 여수 지역은 10월 19일 이후 비슷한 날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아서 제수로 쓰이는 생선 값이 오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직도 아픔으로 이어지고 있는 역사인 여순사건의 발발 당시의 정치사와 민초들의 삶의 형편들, 그리고 구체적인 진행 과정과 그 경위들을 소설화한 대표적 작품으로 빨치산 기자 활동을 하고, 17개월간 빨치산으로 활동하기도 한 작가 이태의 작품 <여순병란>(上,下/ 도서출판 청하)을 들 수 있다.

작가 이태 (1922년 11월 25일 ~ 1997년 3월 6일)의 본명은 이우태(李愚兌)로, 충북 제천군(당시는 중원군) 출신으로 일제의 ‘의용군’으로 끌려가 일본에서 ‘수치스러운 1년’을 보내고 해방을 맞이했다. 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6.25를 맞고, 그 와중에 ‘인민군’의 서울 진입 후 평양의 조선중앙통신사 기자로 흡수되어 28살에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 대원이 되었다. 당

시 남한 빨치산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현상의 ‘남부군’에 편입되어 17개월을 보내기도 했고, 이후 이러한 기억들은 <남부군>이란 장편으로도 작품화된다. 

<여순병란>은 실록소설을 표방한다. 문학적 상상력의 결과물인 소설이지만, 지명이나 인물 및 사건들은 치밀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실록화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여타의 작품들처럼 주인공을 영웅이나 지식인들로 선정한다거나 남도당의 계획적 개입설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작품 속에서 여순사건은 평범한 민초들이 자신들의 열악한 여건의 삶과 그 속에서 산다는 것의 처참함을 지각하고, 그 원인들을 해결해보고자 나서는 과정들의 일환이다.

14연대 반란 역시 일련의 정치적인 사건들에 저항하여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행동이면서도 사건 자체는 우발적인 폭발과 같음이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순사건이 시작된 14연대의 성격에 대해서 작품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해방 이후 “반탁은 애국이고 찬탁은 빨갱이라는 등식이 공공연히 행세하고, 그러니까 빨갱이를 테러하는 것이 곧 애국이라는 논리로 비약하면서 공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찬탁파 청년들은 뒤어어 국방경비대를 찾아들어갔다.”(上 p.64)라고 한다.

또한 “세상을 바로 세우려면 우리가 힘을 가져야 하고 힘을 갖자면 너 같은 양심적인 젊은이가 군대에 들어가야 해.”라는 생각들을 나누며 작품 속 인물들은 국방경비대를 찾는다.

그중 14연대는 가장 열악한 상황에 내몰린 이들이 모여든 변방의 부대였다. 

당시 사회는 ‘해방 후 3당’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해방과 함께 정치에 대한 욕구의 과잉으로 정당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먹고 살기 위한 식당들이 들어나면서 ‘정당, 식당, 불한당’이 해방 후 3당이 된다.

1947년 가구당 생계비 지출이 22,518원인데 당시 비교적 고급에 속했던 대학 교수들 월수입이 2,125원이니 월급의 열 배인 2만원이 적자가 나는 셈이다.

일반 공무원의 형편은 훨씬 더 좋지 않다보니,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온갖 비리가 횡횡한 것이다.

또한 미군정 하에 양곡 통제체제가 시작되어 농가는 자가 식량으로 한 사람 앞에 쌀 4말 5되씩만을 남기고 모두 강제 수매해야 했다. 헐값에 수매되나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사는 것이 점점 더 힘든 세상이었다. 1946년 6월 3일자 신문에는 <청송에서 200여 명이 아사. 사경을 헤매는 농민이 2천여 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소매 물가지수가 해방 이후 220배 이상 뛰어올랐는데 평균 임금지수는 80배를 밑돌았다고 한다.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까지 한국 민중들은 전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높은 물가고, 실업사태, 식량난의 3중고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上 p.81) 이런 형편으로 전국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시위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표명하며 일어난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1948년 10월 15일에 여수 주둔 제 14연대에 내려진다.

이 소식을 접한 지창수 중심의 하사관들은 ‘제주도 파병’을 제주도 인민 학살이라는 ‘동족상잔’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거부하는 방책들을 모색한다.

민중들이 처한 토대 안에서, 14연대 병사들에게 내려진 명령의 부당함 속에서 사건은 필연적으로 요구된 것이다. 그 병란의 와중에서도 민중들은 사랑을 하고 서로가 연민의 정을 나눈다.

이론적이거나 논리적인 지식인들이 아닌 인물들은 모순투성이의 현실을 타계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강한 의지들을 규합하여 행동의 방향성을 정해 가는 것이다.

14연대 반란군의 경찰서 습격의 참상도 잔인하지만  ‘만성리 통곡의 언덕’에서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이 길이 1미터가 넘는 일본도를 빼어 들고, 그저 심사를 받기 위해 경찰에 불려 온 젊음이 중 7명을 베어 죽이는 장면, 부역자 수색 작전이란 이름 아래 여순사건 중 약간의 협력만을 했어도 색출하기 위해, 이웃들을 손가락으로 재판하게 내몰았던 당시의 처참함이 작품 속에 생생하게 드러난다.

“진압군이 여수 시내를 완전 장악한 이날 오후, 거의 전 읍민인 약 4만 명을 서국민학교에 모이게 하고는 경찰관과 청년단원, 우익계 학생들이 이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면식 있는 좌익과 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을 골라내서는 그 자리에서 몽둥이, 총개머리판, 자전거의 체인 등으로 때려죽였다.

여기서도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은 여러 명의 젊은이를 교정 버드나무 밑으로 끌고 가서 일본도로 목을 쳐서 죽였다. 가장 가벼운 형이 총살이었다.”(하, p.45)

작가는 이러한 것을 ‘발작’이라고 하며 이 ‘발작성’은 우리들 영혼의 어느 구석에 잠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역사를 되짚어보는 일,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생생한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발작성을 인식하고, 이를 소멸시키려는 노력일 것이다.

혹시 우리는 공포감이나 초조감으로 섣부르게 서로에게 분노를 분출하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경계할 일이다. 

데스크  yeosune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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