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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의 정국운영은 역시 '견제와 균형'<데스크 칼럼>김현석 편집위원장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전’이라는 뜻을 가진 경국대전은 조선의 기본적이며 핵심적인 윤영 질서를 집약한 서적으로 세조 6년 ‘호전’의 편찬을 시작으로 25년 뒤인 성종 16년에 최종 완성되었다. 오랫동안 수많은 수정과 보완을 거쳐 법률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교육, 군사, 산업이라는 국가운영의 근간이 되는 세부사항들을 세세히 규정한 조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이 완성된 지 겨우 13년 밖에 되지 않아 조선 최초의 정치적 파국인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이는 당시 정치적 급변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살펴봤을 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경국대전이라는 새로운 체제가 선포되었음에도 급속한 정치적 파국의 국면에 돌입한 것이다.

조선 중앙정치의 성공적 운영은 먼저 국왕에 대한 간쟁과 신하들에 대한 탄핵을 맡은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위상이 급격히 뛰어오르면서 시작됐다. 삼사가 기존의 의정부와 함께 국정 운영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는 과전법이 붕괴되어 조선왕조가 계획했던 경제구조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사회적으로는 기존의 훈구세력과 거의 모든 측면에서 이질적인 사림세력이 등장함으로써 지배세력의 교체가 시작되었다.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그렇듯이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발생한 이런 변화들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즉, 삼사의 기능 확립이라는 중요한 정치 제도적 발전은 ‘사화’와 ‘반정’이라는 심각한 성장통을 겪게 했고, 이후 정치적 발전과 갈등, 그 폭발과 해결이 반복되면서 100년 조선왕조의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중앙정치는 국왕과 신하라는 양대 정치세력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개인인 국왕과는 달리 신하들은 그 품계의 고하와 직무의 차이에 따라 대신과 삼사로 다시 구별되었다. 대신은 주로 2품 이상의 관원으로, 특히 의정부 당상(의정,찬성,참찬)과 육조판서가 핵심을 구성했다. ‘대간’은 신하들에 대한 감찰을 맡은 사헌부와 국왕에 대한 간쟁을 맡은 사간원이다. 세 관서는 서로의 임무를 공유하고 넘나들면서 국정 전반에 대한 비판과 감독을 책임졌다. 이 밖에도 국정을 관리하기 위해 섬세하게 안배된 수많은 관서들의 간접적으로 국정에 참여했다.

전체적으로 조선의 정치는 국왕, 대신, 삼사라는 세 개의 주요한 정치세력이 시기와 국면에 따라 협력과 대립관계로 바뀌어 가면서 나라를 운영해 나갔다. 이 체제에서 주목해 봐야 할 점은 전근대의 왕정에서 국왕의 영향력은 치세의 전체적 성격과 특징을 일차적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이고, 조선의 왕권은 그 전제성이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특징을 가졌다. 국왕과 국가를 동일시 여기는 지배원리는 변함이 없었으나 실제로는 국왕의 개인적 성향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는 상당한 영향력과 파급력을 끼쳤다.

대신과 삼사로 앙분한 신하들의 영역에서 각 관직의 고유한 업무와 관리체계는 확실히 나라 운영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실록에서는 여러 번 “대신은 임금의 팔과 다리이고, 삼사는 눈과 귀”라는 정형적 표현이 등장한다. 대신과 삼사라는 관직의 층위와 부여된 역할이 서로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상위에서 정책을 포괄적으로 심의하면 실제적 집행을 담당한 의정부와 육조는 그 임무상 현실적, 보수적 입장에 서기 쉬웠고, 이 때문에 애초 정책의 원칙 혹은 취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 하위 정책과정에서 탄핵과 간쟁을 맡은 삼사의 역할이 중요했고 이들의 역할에 따라 다시 애초의 정책 취지가 도덕적 견지에서 재조명되고 민심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게 하였다.

대신과 삼사의 성격은 서로 다르고 고정적이었지만 그 구성원은 언제나 유동적이었다. 당시 유망한 관리들은 거의 대부분 삼사를 거쳐 대신으로 승진했다.

인사행정에도 변화를 기했다. 임기가 단축되면서 인사이동이 잦아졌지만 다시 그 관직에 임용되는 비율이 늘어나기도 했다. 이 부분은 특히 삼사와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삼사 장관의 임기는 성종대에 반년을 조금 넘었다가 연산군대를 거쳐 중종대에는 그 절반으로 줄어들었는데 약 40%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단 파직된 뒤 다시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인사이동이 만성화에 가까울 정도로 빈번해졌지만 일단 파직된 뒤에도 상상수의 사람들이 다시 그 관리에 임용되는 구조는 그 자리가 ‘과감한 탄핵’과 ‘간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임용될 소지가 많았기 때문에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적극적인 관직 생활에 임할 수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우리 선조들의 국정운영 기틀은 견제와 균형이었다. 각 층위로 구성된 관리들의 세세한 임무 부여와 역할들이 100년 정치의 기반을 조성한 것이다. 결국 관리들의 역할 수행이 매우 중요한 것인데, 중앙정치든 지방행정이든 공적인 임무를 담당하는 ‘공직자’들의 자세와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떠오르게 한다.

김현석 기자  arguskim@outloo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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