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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순천에서 국군의 민간인 학살-당시 토벌대 군인들의 증언역사학자 주철희 박사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저서 '동포의 학살을 거부하다', '불량국민들'>

국방부는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군인 반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순천에서는 민간인 학살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밝히 ‘순천지역 여순사건’을 정리하여 본다. 대부분 당시 토벌군으로 출동했던 군인의 진술(증언)이다. 

아래 글을 통해 ‘순천지역 여순사건’에서 국군에 의해 어떻게 민간인이 학살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현재 국군이 밝힌 여순항쟁에 대한 문제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10월 23일 이후 ‘순천지역 여순사건’에서 벌어진 끔찍한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10월 23일 순천을 장악한 군경은 시민들을 북국민학교에 모이게 했다. 이곳에서 본격적인 ‘반군가담자 심사’가 시작되었다. 혐의를 벗기 위해서라도 시민들은 운동장에 나와야만 했다. 당시 순천농림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김정만도 반군의 지시로 보초를 서다 진압군에게 붙잡혀 북국민학교로 끌려갔다.

 

그는 진압군이 군산에서 온 12연대라고 말했다.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은 채, 북국민학교 후원에 2∼3일간 억류되어 있던 그는, 교실에서 취조를 당하던 이들 중 여럿이 총살당하는 듯 총소리가 난무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진압군은 혐의가 뚜렷한 이들을 교실에서 끌고 나와 학교 운동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 동조자를 ‘지목’하게 했다. 이른바 ‘손가락 총’이었다.

한편 순천사범학교 사범과 4학년(20세)으로 북국민학교에서 당시 상황을 목격한 참고인 정영호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거기는 아주 지옥이었어. 갔더니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어요. 칼빈으로 막 쏴 죽이더라고. 끌려온 사람한테 앉아 있는 사람 중 반란군협조자를 골라내라고 그러더니 지목당한 사람을 옆으로 끌고 가서 쏴 죽였어요. 손가락질 지목을 당한 사람은 가차 없이 사람들 있는 앞에서 칼빈 총으로 쏴버렸어요.

내 눈으로 그걸 봤어요. 군인도 있고 경찰도 있었어요. 한 열댓 명 죽은 거 봤어요. 칡백나무 부근에서 쏴 죽여서 그 나무 아래로 밀어 넣더라고. (…) 옆으로 지나가면서 이 사람이라고 하면 항의고 뭐고 없이 죽여버리니까. 내가 얼굴이 안 알려져서 살아남은 거겠지요.”(정영호 증언)

위의 진술처럼 진압군과 경찰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시민들을 수용하여 반군협력자를 적발하기 시작했다. 누가 ‘가담자’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없었고, 경찰, 우익요원, 청년단원 등 반군 치하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던 집단들이 색출 및 적발 심사를 담당했다.

제3연대 1대대 2중대 3소대에 근무했던 참고인 김○○은 “순천농림중학교에 주둔하면서 반군에게 짐을 운반해주는 등의 반군에 협조한 혐의를 받고 있는 민간인을 색출 및 연행했다”면서, “중대장 및 간부들이 조사한 후, 선임하사가 분대원을 이끌고 구덩이를 파서 사살한 뒤 매장했다”고 진술했다.

제3연대 2대대 7중대 소속 참고인 박○○은 “순천농림중학교에 주둔하며 수색작전 중 국군을 반군으로 오인한 민간인이 골목에서 나오면, 체포하여 속옷 차림으로 데리고 다녔다”면서 이를 본 다른 부대 지휘관(육사5기로 기억)이 “불편하고 번거롭게 뭐 하러 데리고 다니느냐며 총살하라고 하여 순천에서 여수로 가는 길 뒷산에서 모두 총살했다”고 진술했다.

순천철도국에 주둔한 제3연대 2대대 5중대 소속 일등병 전○○는 “순천에서 학교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반군협조 혐의자 심사 후 즉결처형했다”고 진술했다. 전○○와 같은 5중대 소속 인사계 주임 특무상사 한○○는 “지휘관이 반군 출현 정보를 입수하면, 중대장 및 소대장 인솔 하에 순천, 구례, 곡성, 광양, 남원, 운봉, 순창, 산청, 함양, 안의 등으로 반군토벌작전을 전개했다”면서, “순천, 구례, 광양 등 토벌작전지역 부락에서 반군에 협조한 주민들을 즉결처분했다”고 밝혔다.

순천남국민학교에 주둔했던 제4연대(연대장 이성가) 2대대 6중대 2소대 소속 참고인 임○○은 “국군과 반군 모두 민간인을 많이 희생시켰다며, 주로 지역 주민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등 반군협조 관계를 제보하여 희생당했다”고 증언했다. 

순천에 진입한 제4연대 1대대 4중대 소속 참고인 조○○은 여순사건 당시 순천지역에서 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많았다고 인정했다. 본인이 속한 광주 “4(20)연대나 마산 15연대가 순천, 보성, 담양, 장성 등 진압 및 토벌작전 과정에서 반군에게 식량 등을 제공한 마을을 포위해,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 마을주민 전부를 모이게 하여 사살한 일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사살은 “소대장이나 중대장 등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제4연대본부 정보과 소속의 일등중사 참고인 전○○은 “4(20)연대가 순천 풍덕동 옛 펄프공장에 주둔하면서 반군협조 혐의자 색출작업을 벌였고, 당시 억울하게 즉결처분당한 사람이 많았다”고 진술했다. 1대대 3중대 3소대 소속 참고인 김○○도 “4연대를 포함한 군경이 반군협력 혐의 민간인들을 조사나 재판 없이 즉결처형했다”고 말했다.

5여단 통신중대 소속으로 4(20)연대 3대대에 파견된 참고인 최○○는 “순천시 풍덕동 옛 펄프공장에 연대본부와 함께 주둔하면서, 경찰이 반군협조자를 연행하면 군경이 취조했고, 혐의가 인정되면 순천 시외 야산에서 구덩이를 파고 총살한 후 매장했다”고 말했다. “1회 10여 명 정도를 즉결총살했으며, 참고인은 순천에서 민간인 즉결처분을 3회 이상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중대장 급에서 즉결처분을 지시, 총살을 명령했으며, 당시 재판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제12연대 3대대 12중대 3소대 참고인 이○○는 “순천 진압시 작전 성과로 대대에 희생자 목을 베어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순천 북쪽 산골마을 민간인 3명을 잡았는데 소대장이 소대에서 가장 온순한 사람으로 참고인을 지목해 즉결총살을 명령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가장 용감한 군인 한 명에게 술을 먹여 민간인을 ‘즉결’한 다음 그 목을 카빈에 착검한 대검으로 잘랐으며, 잘린 목을 어깨에 메고 시내에 들어와 작전 전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그 희생자는 “반군이 아니었고 반군에 협조했다는 민간인이었다”고 증언했다.

제12연대 2대대 8중대 소속 참고인 오○○는 “3일 동안 순천에서 공포탄을 쏘며 집집마다 수색을 했고, 촌락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즉결사살’했다”고 진술했다. 오○○와 같은 중대인 8중대 4소대 소속 참고인 한○○은 “반군과 격전을 할 때 민간인 희생이 많았다”고 증언했다.

한창규의 진술에 따르면, 순천 작전 시 시가전을 벌여 20여 명의 반군가담 혐의자를 잡았고, 북한 출신의 20대 중반 6중대장 이동호가 2대대 병력이 보는 앞에서 일본도로 그중 두목격인 1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제15연대 참고인의 진술 중에는 15연대가 혐의자의 친인척들에게 혐의자를 척살하도록 교사한 대목이 있어 15연대 가해행위의 수준을 가늠케 한다. 1949년 4월 순천농림중학교에 주둔했던 1대대 1중대 1소대 소속 참고인 전○○의 진술에 따르면, 15연대 1대대가 1949년 봄 순천 황전면 괴목의 산골부락(20∼30여 호, 집성촌)에서 반군협조 혐의자를 색출했다. 반군협조 혐의자가 혐의를 부인하자, 혐의자와 두 가족 모두(5∼6명 정도)를 마을 앞에 모아놓았다.

그러고는 그들과 친척 관계인 부락주민들로 하여금 대검이 착검된 M-1으로 두 가족 모두를 직접 척살하게 했다. 당시 대대장(이소동)이 연대장(유춘근)에게 무전으로 보고한 후 중대장(육사7기 또는 8기)에게 척살을 지시했다.

위와 같이 당시 토벌로 참여했던 군인의 증언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순천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이 없었다고 한다. 뻔뻔하고 파렴치한 행동이다. 한 장의 사진을 공개한다. 1948년 10월 23일 순천에 도착했던 라이프지 기자인 칼 마이던스이 촬영한 사진이다.칼 마이던스은 사진 아래 설명을 덧붙였다. 그 내용까지 모두 공개한다.

여순사건 당시 라이프지 칼 마이던스 기자 사진. 이 사진의 칼 마이던스 사진 설명은 Caption from LIFE. "Dead rebels, their bodies dotted with bullet holes, lie beside a school ground at Sunchon."

사진 설명은 “총탄 자국이 몸에 점처럼 찍힌, 죽은 반군들이 순천의 한 학교 운동장(교정) 옆에 누워 있다" 또는 "죽은 반군들, 총탄에 맞은 그들의 시체들은 순천의 학교운동장 옆에 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앞서 맨 처음 등장한 증언, 10월 23일 순천 북국민학교에서 자행되었던 학살에 대해 김정만과 정영호를 연상하면서 사진을 보면 될 것이다. 칼 마이던스의 이 사진은 바로 순천 농업학교(현 순천대학교)에서 자행된 군경의 학살 사진이다. 당시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순천 북국민학교가 집합시켰으며, 학교가 비좁아 순천농업학교로 대부분 이동시켰고 여기에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위 사진에 보면 버젓이 군인이 서 있다.

군인의 비호를 받아 민간이 학살을 자행된 것이다. 당시는 계엄령 상황이었고, 모든 권한은 계엄사령관에게 있었다. 그리고 학살이 있었고, 군인은 이를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민간인을 학살했는지 충분히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국방부 행태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오만불손에서 시작되었다. 여전히 1948년에서 시작하여 40여 년 이상 군부독재의 비호를 받았던 ‘아름다운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순항쟁 특별법은 제정은 국회의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국방부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국방부이다. 국방부와 전면전을 선포하며, 국방부의 잘못된 인식과 논리를 깨는데 집중할 것이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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