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정 (순천대 외래교수)

오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게 된다. 푸르른 금강산을 그린 그림 앞에서,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상징하는 2018mm의 폭으로 제작된 테이블에서 마주하게 될 두 정상이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성큼 다가가는 성과를 내기를 모두 기원하고 있다.

첨예한 이념 갈등의 결과로 맞이한 한국전쟁의 상처는 현재의 한국 사회의 모습 속에서 아픔인 채로 그대로 경험되고 있다. 서로를 향한 손가락 총을 겨눌 수밖에 없게 한 체제의 비정함 앞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되어 슬픔에 차서 서로를 원망하며 지내왔다. 아직도 이러한 서로의 아픔들을 무기로 내세워 상대를 단죄하고 몰아가려는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구도적 대립 전략이 아직도 유효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모습을 종종 본다.

이러한 대립이 아직도 여전한 까닭을 이청준은 이념과 전쟁이 가져다 준 피폐한 삶에 대해 우리가 언제까지나 원망과 비탄에 찬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누구보다 피해자의 편이었던 작가는 그 피해자의 얼굴이 아니라 서로가 가해자의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아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장흥 출신의 소설가 이청준(1939년~ 2008년)은 8․15 해방을 전후한 2,3년 사이에 그의 아버지와 3형제가 차례로 세상을 등지는 네 사람의 육친의 죽음을 경험했고, 한국전쟁 중 외종형 혼자만 남고 외가가 몰살당한 처참함을 겪었다. 어린 나이에 전쟁 때문에 많은 죽음을 경험해야 했던 작가이다.

전쟁의 두려움은 그의 작품 속에 ‘전짓불 공포’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수없이 되풀이 된다. 캄캄한 밤중에 방문을 벌컥 열고서 눈부신 손전등을 비추던 이들. 환한 빛 뒤에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어느 편인지를 물어대는 이들에게 그 어느 편도 아니지만 그 어느 편이라고 말해지길 강요당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의 공포. 또한 이편과 저편을 나누어 서로를 고발하게 하거나, 서로를 향해 줄뺨을 때리게 하는 부조리함이 난무하던 시대를 지나온 작가였다.

『숨긴 손가락』(열림원)이란 제목으로 묶인 이청준의 중단편집에는 이 같은 이념 갈등과 전쟁의 폭력을 담아낸 소설들이 실려 있다. 외가의 몰살로 인한 어머니의 슬픔이 고스란히 배어나는 <개백정>과 남북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이 애잔하게 그려진 <흰철쭉>을 비롯해 손가락총의 음모와 비정함이 알레고리화 된 <숨은 손가락>과 통일에 대한 세대 간의 시각차를 좁혀가기 위한 실천적 자세에 대한 성찰이 그려진 <가해자의 얼굴> 등의 작품들로 묶여 있다.

<숨은 손가락>은 청색군과 흑색군의 전쟁으로 인해 마을사람들이 겪게 되는 갈등과 고통을 다룬 소설로 한국전쟁 무렵 우리 사회를 어지럽혔던 이념적 갈등의 본질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동준과 현우라는 두 인물은 친구였으나 적이 되어 서로에게 복수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대립은 뚜렷한 사상의 확고함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 개인의 숨은 이해에서 출발하여 거창한 이념의 의상을 마련해 입고 다니는 경우”에 의한 적대관계이다. 즉 이념 갈등 이전에 그들의 아픔의 근원은 내면에 숨어 있는 욕망과 욕망의 좌절에 따른 증오의 감정이 더해져 섬뜩한 파국을 몰고 온 것이다. 전쟁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숭고한 이념의 실현을 위한 것인 양 하지만 실상은 인간의 파렴치함의 노골적 표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청준은 무엇보다 가장 우선인 실존이 달린 문제 앞에서 서로를 손가락질 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임을 역설하기를 멈추기를 바라고 있다. 이청준은 <가해자의 얼굴>에서 피해자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간에 피해자로서의 반격을 위해 어느덧 그들은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 가해자였던 이들의 수난을 요구하기에 나서고 있다고 우려한다. 수난자 의식은 일정한 시간대를 거치면서 항상 새 가해자로 변신해 가게 되며 복수와 보상, 억압과 수난의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진정한 화해와 이해를 지향하고 만남의 문이 열리게 하기 위해서는 너나없이 가해자의 얼굴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 <숨긴 손가락>의 구성에서 드러나듯 우세한 진영이 어디냐에 따라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강요했던 당시의 자리에 서서 그때의 제 허물을 생각하고 그 빚을 갚으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란 단죄의 과정을 겪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청준은 이념으로 무장한 체제의 칼날과 전쟁의 포화가 안긴 고통과 아픔, 그리고 그것이 낳은 죽음들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체험했던 작가이다. 그가 죄를 묻고,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할 만한 대상이 그만큼 많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청준의 이 같은 ‘가해자의 얼굴’이기를 요구하는 것은 먼저 스스로에게 돌을 던질 만큼 무죄한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일 터이다. 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실천적 성찰의 한 면으로 이청준의 ‘가해자의 얼굴’은 새겨둘 만한 관점이지 않을까 싶다.

4월 29일 마주하는 남북한은 피해자가 되어 권리를 주장하는 기세당당한 얼굴로서가 아니라 민족분단이라는 모순의 상황을 자아낸 가해자의 얼굴이 되어 서로의 상처 앞에 무릎 꿇는 자세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한다. (2018. 4. 25.)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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