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정 (순천대 여순연구소)

여순사건 70주년을 앞두고 올해는 다양한 방식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27일에는 여수·순천·광양·보성·고흥·구례 6개 지역의 학술 연구 단체 및 시민 사회 단체 80개소가 연대를 이루어 ‘여순항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발대식을 가졌다. 지난 7월에는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광주 전남 교수 노조를 비롯한 여러 102개 사회단체와 공동 명의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 오는 9월 4일에는 순천역 광장에서 여순 10·19 특별법 제정 범국민연대 캠프를 열고 지역은 물론 서울 등지로 외연을 확대해 범국민 연대를 이끌어나가 10월 20일에는 특별법 제정을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20만명 조직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여순사건의 피해자나 유가족들을 비롯한 관련인들은 서로 화합하기 어렵다는 말들이 있어왔다. 이편, 저편으로 갈리면서 발생한 사건이고, 사상적 대립과 갈등이 있던 사건이니 그 앙금이 서로에게 오래도록 남아 있어 쉽게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여러 방면에서 뜻을 맞춰가며 연대를 이루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고 있어서 고무적이다.

여순사건의 참상을 한 눈에 보여주는 사진 중 하나는 서국민학교 운동장에 좌우로 나뉘어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 사진은 계엄령이 선포되어 언론이 통제되던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안전한 곳에 피난해 있는 여수사람으로 사진해설이 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진은 줄을 잘 서야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진압 군인들이 14연대의 주동자, 가담자, 부역자 등을 선별, 색출해 좌우로 나눠놓은 사진이었다. 단순히 겉모습의 특이점 때문에, 고발을 부추기는 종주먹질에 어쩔 수 없이 한 손가락질의 결과에 의해 이편이 되기도 하고 저편이 되기도 한 이들은 생사가 갈렸다.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자초지종을 설명할 겨를도 없이 즉결처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실제 사진 오른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부역혐의자들로서 이들 중 89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너와 나, 이편과 저편, 적과 아군으로 나뉘는 속에서 비극적인 역사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진인 것이다.

이청준의 「숨은 손가락」에는 누군가를 손가락질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된다는 가혹한 운명에 사로잡힌 인물의 공포와 트라우마가 그려진다. 그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지만 그것은 그 어떤 선택도 하기 어려운, 빠져나가기 어려운 함정에 갇힌 꼴이다. 어떤 자의적인 판단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비극적 운명에 사로잡힌 노예나 포로에 불과하다. 아무런 힘이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다. 이청준은 여순사건이나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대에 10살 안팎의 소년이었다. 때문에 당시를 그린 작품인 「개백정」, 「가해자의 얼굴」, 「지하실」 같은 작품에는 소년 화자가 등장한다. 당시의 이청준의 분신일 수 있는 이들 화자의 공통점은 앞서 운명 앞의 노예처럼 힘이 없는 성인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했었어야만 했지만 마비된 듯 꼼짝할 수 없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 「개백정」에서 소년은 마냥 귀염둥이인 노랑이와 복슬이라는 개를 구했어야 했고, 「지하실」에서는 아이들 간의 어려운 일을 늘 앞장서서 돌봐주고, 불편한 몸을 사리지 않고 요령껏 제 동네 아이들을 보살피기도 했던 윤호를 의심했다는 사실을 후회한다. 또 「가해자의 얼굴」에도 누님 집에 더부살이로 얹혀살던 중학교 2학년 학생이던 화자가 도망자인 자형의 친구라던 청년을 숨겨주지 않았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강한 빛을 내리쏘는 전짓불을 앞에 노출된 이들은 어떤 주체적인 힘도 가질 수 없는 초라한 목숨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상대의 힘 앞에 한 마리의 벌레이거나 잡초일 뿐이고, 영문도 모른 채 노랑이와 복술이 같은 개처럼 희생된다. 어린 소년 화자에 의해 서사화 된 소설에서는 이런 공포 앞에 마비되는 증상들을 보이며, 어른들은 외면하거나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

그러는 동안 그 광경을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괴로운 체험 가운데에서도 가장 두려웠던 것은, 방관자들의 침묵과 자신들을 잡아온 사람들 앞에 꿇어앉은 사람들의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모습- 그리고 총살되기 위해 끌려가면서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한 마디의 항변조차 없었고, 동정을 바라는 울부짖음도 없었고 신의 구원을 바라는 어떤 중얼거림도 없었다.

위 인용문은 앞서 언급한 그 사진과 관련한 언급이다. 1948년 여순사건 현장에 외국인 사진기자로 참가했던 칼 마이던스가 여수서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혐의자 색출과정을 보고 쓴 글의 일부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정확히 칼 마이더스가 의문시했던 그 마비와 침묵의 원인이 되는 내면의 공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청준 소설의 인물들은 이러했던 당시의 인간에 대한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죄의식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을 때, 그리고 부끄러움은 해야 할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생겨난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폭력적인 행동들을 자행했다는 죄의식과 그 폭력 앞에서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던 부끄러움이다. 이런 성찰이 작품 속에서 어린 소년의 무력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후회로 반복된다. 그것이 이청준의 윤리이다. 다시 말하기, 또 말하고 또 말해서 인간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모색을 지속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공포와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로 다시 돌아가 그것에 맞서기 위해서 어떠했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논의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의 해답이 연대이지 않을까 싶다. 이 편 저 편으로 갈라놓고, 여기는 옳고, 저기는 그르다는 식으로 단죄하고 낙인을 찍으면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영원히 힘을 가진 권력자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편이 되기 위해 복종해야 하고, 그런 편이 아닌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며 스스로를 억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롭기 위해 이편, 저편 없는 한 편이 되는 방법이 지금 우리가 찾아낸 하나의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획일화와 동일시를 위한 한편이 아닌 다양성이 인정되며, 각각을 포용하며 아우르는 한편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18.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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