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정 (순천대 여순연구소)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 형성을 위한 다양한 방식의 배치와 통제, 배제와 억압으로 경계 짓기를 시작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편, 저편으로 분열시켜 빨갱이가 아닌 국민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각인시키려고 폭력과 법, 생활규범 등을 통해 신체와 내면을 규제해나갔다. 종교와도 같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작동은 절대적인 금기들을 설정하면서 자발적 순종만을 요구했다.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특수성 앞에서 인간으로서 공유해야 할 보편의 가치나 각 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윤리는 부질없어 보였다. 이청준은 이러한 폭력의 율법을 내면화한 채 공포로 고개 숙이고 침묵하며 생존의 절박함에만 매달린 인간의 부끄러움에 주목했다.

이청준(1939년~2008년)은 소년의 나이에 경험한 좌우익 대립과 한국전쟁을 ‘전짓불 공포’라는 메타포로 소설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주시켜왔다. 캄캄한 밤중에 방문을 벌컥 열고서 눈부신 손전등을 비추던 이들. 강렬한 빛 뒤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느 편인지를 물어대는 이들에게 그 어느 편도 아니지만 그 어느 편이라고 말해지길 강요당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의 공포. 이 생존의 공포 앞에서 인간은 부끄러운 존재가 된다. 이청준의 <개백정>, <숨은 손가락>, <자유의 문>, <지하실>과 같은 소설에는 한낱 개와 같거나 송충이나 깜부기와 같은 벌레나 병균 같이 여겨지는 인간의 존재, 어찌할 힘이 없는 어린 소년이거나 운명과 같은 올가미에 묶여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들은 공포로 고개 숙이거나 침묵하고, 감정마저도 표출할 수 없이 마비된 존재로 보인다. 심지어는 부질없는 자기 배반마저 일삼는다.

마을에서 제법 번듯하게 자리를 잡고 산 것이 허물이 되어 반동으로 취급받으며 사회주의 사상가들에게 일가족이 몰살되다시피한 외가. 외숙모는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구덩이에 던져진 죽음의 문전에서 가족을 파탄으로 몰아댄 편을 향해 “인민 공화국 만세”를 부르며 죽어간다. 반대로 적치시절 동네 인민위원장을 지낸 사람은 자신에게 총살을 선언한 국군의 총구 앞에서 “대한민국 만세!”라는 외마디를 터트리며 숨진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이며, 생존의 절박함 앞에서의 부질없는 몸부림인가.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구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을 수밖에 없는 손가락질을 해야 하는 부끄러움과도 직면했던 때이다.

이청준은 문학 속에서 이러한 체험들을 곱씹으면서 자신과 당대 힘없던 이들을 씻김질 할 방도를 강구한다. 그것은 세계를 향해 저항의 칼날을 뽑아드는 대항적 폭력의 방식이 아니다. 폭압적 상황에서도 의연한 모습으로 매사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게 자기진실을 말할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폭력 앞에 피해자가 되어 무력한 주체로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을 지속하면서도 모두에게 말 건넬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자기 삶의 주제자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청준 소설에서 이런 인물들은 ‘키 작은 자유인’으로 불린다.

이 씻김질은 소설 속에서 자기 부재의 욕망과 자기 증명의 욕구, 자기증거 소멸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처음 이청준은 이 말도 안 되는 부조리한 상황들, 폭력의 공포 앞에서 자기를 빼내고 싶어 한다. 자기를 숨기고 도피시키거나 유기하는 자학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몸과 영혼이 받은 충격과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일단 그 상황에서 자신을 빼내오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다음은 자기 증거의 욕구로, 사라진 자신을 다시 불러내는 과정이다. 부끄러웠던 무력한 인간들에게 이름과 목소리를 부여하고 그들의 말을 찾아주기 위해서이다. 배제되고,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소설로서 그들의 이름과 자리, 몫을 되찾아 주려는 것이다. 이 진술 욕구는 7,80년대 군사 독재와 유신 정국 하에서 또 하나의 공포증이 되지만 그를 극복하는 글쓰기를 지속하면서 충실하게 이행된다.

그리고 마지막의 방법은 자기증거 욕구의 소멸에 이르러야 한다. 문자화된 자신의 소설이, 문학이란 틀이 독자와 자기 자신을 또 다른 방식으로 억압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의 소설은 다양한 방식의 말하기를 통해 문학과 떠도는 말의 경계를 지워가려고 한다. 자전적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구분이 안 되는 소설이거나 풍문을 옮겨 적은 듯한 액자소설이거나, 연작 소설로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지거나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법은 어떤 것도 고정되거나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문학적 표현이다. 문자로 굳어진 소설이 곧 해체되어 또 다른 소설로 변주되는 형식인데 이로 인해 그는 자유의 작가로 이름 붙여진다. 그리고 이 자기 증거욕의 소멸은 작가의 개별성에만 머무는 것, 자아 증명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말 건넬 수 있는 보편성을 도출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굳건한 주체로 우뚝 선 후 모두 속에서 어우러지는 주체를 꿈꾼 것이다.

이러한 이청준의 문학을 누구는 실천적이거나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이청준의 문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의 지점을 신화처럼 제시한다. 변증법적인 사유는 반복을 낳을 뿐이며, 현실적 대립을 통한 전복이란 것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 그러니 폭력의 주체들이 사라지고, 모두가 자기 진실에 당당해지는 세상, 그러면서도 자신만을 내세우고 증명하는 일이 없는 주체들의 세상. 이청준은 그의 소설로 이 새로운 주체들의 세상이 도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전하는 사도라고 할 수 있다. 뜬 구름 같아 보이는 그의 관념적 소설의 메시지가 공격받을 수 있는 것은 유물론의 시대에 어쩌면 당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모두에 대해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진정 부끄럽지 않을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가자는 것이다. 그 자유인은 대단하거나 거대한 명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신을 지속하면서 모두에게 마음을 여는 ‘키 작은 자유인’이면 된다. (2018.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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