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정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얼마 전 대학에서 한나 아렌트의 ‘사유의 의무’에 대한 내용으로 강의를 하던 중 수업을 듣던 한 대학생이 던진 질문에 충격을 받았다. “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학살’이라고 규정하며, 왜 그것이 나쁜 폭력이라는 것인가?”라고 질문하는 그 학생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의심해 보고 질문을 던져라’라는 평소의 강의 내용을 너무 잘 흡수한 나머지 생긴 부작용인가? 아니 효과인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되물었다. 그 학생은 그냥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한다. 누가 나서서 정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해주기를 바란단다. 그 역시 ‘사유의 의무’에 대한 중압감을 견디기 버거워 대신 판단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폭력은 나쁜 것이다’라고만 알고 있었다가 문학이나 영화에서 다뤄진 혁명이나 민주화 운동에서 정의의 편에 선 사람들이 비폭력으로만 대항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오는 ‘폭력’에 대한 철학적 사유일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은 히틀러의 선택은 ‘나쁜 폭력’이고, 14연대 소수자의 ‘반란’이라 치부되었던 항명이 왜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 되는 것인가? 무기고를 탈취하고 국가에 대항한 것이 모두가 항쟁이 되지는 않을 텐데 그 판단의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하는가?

예전의 내가 그랬듯 무엇이든 정확하고 분명한 정답만을 찾도록 훈련된 학생들이 강의 시간에 느꼈을 혼란스러움이 어떠한 것일지 충분히 짐작되고 남았다. 그동안 그 학생은 문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작동하는 여러 가지 규율과 법, 제도와 체제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구현해 나가는 국가는 어떤 절대적인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부조리함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폭력은 어떤 행위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니라고 한다. 폭력은 행위와 그 행위가 이루어진 맥락 사이에, 활동적인 것과 비활동적인 것 사이에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그 맥락에 따라 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고 비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때로는 공손한 미소도 야수적인 감정의 폭발보다 더 폭력적일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나 국가 권력이 구가하는 폭력은 비가시적이면서도 주관적인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구조적인 폭력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동학혁명이나 4·19혁명 등 폭력을 수반하는 급진적-해방적 정치는 분명 무능을 감추기 위한 폭력의 분출과는 다르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라고 할 수 있는 혁명은 능동적인 것이고 어떤 비전을 제시한다. 그러나 하던 것처럼만 계속되는 조용한 질서를 바라는 기득권자들이 분출하는 폭력은 반동적인 행동이며, 그들의 무능을 감추기 위한 것일 뿐이다.

진리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고통과 용기의 경험이다. 그리고 때로는 다수파라는 숫자나 힘이 아니라 고독 속에서 진리를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외부적인 보증도 받을 수 없는 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여러 가지 장치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이지만 우리에게는 자유 그 자체, 자유가 정말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 과정은 ‘몫 없는 자들’, ‘말 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가 단지 특수한 불만이 아니라 실제로 보편적 진리가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도 하다.

이 보편적 진리는 이청준이라는 소설가나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이 강조하듯이 ‘객관적’ 진리가 아니다. 자기가 가진 주관적 입장을 의미하는 자기 관계적 진리이며 참여적 진리이다. 이를 위해서 각각의 주체는 스스로의 삶에서 만나는 사건들 속에서 충실성을 발휘하며 진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올 한해 문학 칼럼은 여순사건 70주년과 관련한 작품들과 글들로 이어갔다. 오랫동안 국가에 의해 강요된 역사를 재정립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유가족들과 여러 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시도했던 여순 10·19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민청원 역시 국민이 아닌 소수자의 절규에 그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라는 반증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노력은 단순히 여순사건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월호의 참상 같은 깊은 슬픔을 안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자’들만이 구현해 낼 수 있는 진리의 과정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새해에는 서로에게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차이를 따지고, 옳고 그름으로 재단하는 해가 아니라 우리가 지닌 공통점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모두에게 말 건넬 수 있는 은총의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2018. 12. 19.)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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