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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32> 살아 꿈틀대는 세상 끝, 섬한창훈,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
송은정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거문도 출신의 소설가 한창훈은 그의 고향을 ‘세상의 끝’이라고 한다. 그의 소설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2001)과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2003)는 그의 귀향 결심과 고향에의 안착과 연결되고 있음이다.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인 마흔 이전에는 음악실 디제이, 트럭운전사, 커피숍 주방장, 이런저런 배의 선원, 건설현장 막노동꾼, 포장마차 사장을 하기도 하고, 상선을 타고 대양을 누비기도 했다는 그의 이력이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에서 간간이 확인된다. 단편들로 구성된 이 소설은 세상의 끝으로 내몰리는 피곤한 길 위의 사람의 이야기이다.

<세상 끝으로 간 사람>에서는 그 불안정하고 예민하게 신경의 날이 선 사람이 있다면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에는 집에 돌아와 일상을 살아내는 평온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나’가 있다. 그 일상들은 각각이 하나의 에피소드들로 단편소설 같은 독자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고, 집을 중심으로 한 연속적인 삶의 시간들이기도 한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세상의 끝인 섬에서 그는 그의 모든 감각을 깨워 주변의 자연과 사물들과 교합한다. 바닷물 의 부드러운 일렁거림에 몸을 맡기고 사정하고, 관능적인 바람과 안개에 둘러싸여 무적 소리에 맞춰 절정에 이르며, 태풍 속에서 불나비와 반딧불과 거미와 영혼의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격정의 소용돌이나 신경질적인 방사가 아닌 아주 원초적인 자연스러움으로 풀어지는 교합이다.

이러한 합일의 표현들은 섬에 정착한 그가 주변의 대상들과의 거리를 최대한 좁혀 그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본질의 파장이나 결들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느끼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안개는 네가 가루로 변해 뿌려진 저쪽 강에서 무진무진 피어오르고 있었다.

너는 밤새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저 추운 강물 속에서 제 살 타고 남은 뼈로 어미가 태워준 옷을 기우며 노래를 불렀을 게다. 밤새 부른 노래가 어디로 가지도 못 하고 그물처럼 촘촘히 쌓이다가 이제 잠을 자야 하는 새벽이 되자 물위로 안개가 되어 솟아오른 것이다. 그러면 그 물방울들은 풀 속의 벌레들 목을 축여주고 나무 잎새도 씻어주고 어미의 눈물도 가려주고 취해 새벽길에 돌아오는 아비의 잠방이도 적셔주고 동생이 대밭에 눈 오줌도 덮어주고 하는 것이다. 가락이 깊다면 안개도 깊을 것이다. 너는 이제 물속에서 잠들 시간. 나는 네가 불러놓은 노래를 만나고 있는 것인가. ( 「지상에 남은 마지막 밤」,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26쪽)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한 이틀 섬에 머물던 맑은 기운이 물러나면서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올랐다. 봄이 무르익다 못해 더워지기 시작하면 남쪽 바다는 안개의 시절이 된다. 가는 비가 오락가락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은 안개와 은근한 바람과 빗방울의 세상이 되어버렸다.(중략) 물알갱이들의 고향은 바다. 무엇 때문에 해마다 이 시절이 되면 바다는 제 몸을 가루 내어 피워 올려 모든 경계를 지워버리는 것인지. 왜 명쾌한 구분을 없애버리는 것인지는, 왜 열다섯이 되면 거웃이 돋고 가슴이 솟는지를 궁금해 할 필요 없는 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도 어떤 과정의 한 중간도막이었다. 달아올랐고 그 달아오름이 부끄러운 것이고 부끄럽다는 것은 무언가를 새롭게 눈을 뜬다는 것이다. 바다는 해마다 이 시기에 또 한 번의 개안(開眼)으로, 달아오름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다. (중략) 안개가 있는 이상 이 세상은 안개 자체였다. 섬은 안개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완벽한 섬의 실종이었다. ( 「무적(霧笛)」, 『섬, 세상 끝을 산다』, 80-81쪽)

한창훈의 소설들에서 안개는 이렇게 다르게 표현되며 의미 지워진다.

롤랑 바르트는 하나의 존재가 가진 고유성이나 개별성은 다양한 ‘뉘앙스들’과 여러 ‘무늬들’을 통해 현현되며, 이것은 일종의 본질성이 되어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게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하나의 존재를 다른 존재들과 구별하게 하는 것을 ‘디아포라’적 요소라고 하는데 이는 글쓰기를 통해 재현되며, 특히 문학은 이 같은 디아포라적 요소를 잘 포착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문학을 실현하는 도구인 ‘언어’는 체계화, 일반화 법칙화되며, 파시스트적이기도 하다. 때문에 ‘문학’은 이처럼 경화되고 법칙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는 ‘언어’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 낯설고, 기이하고 새로운 태도로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어’에 의해 포획, 재현되기를 거부하는 존재의 디아포라적 요소들을 잘 드러낼 새로운 언어를 마련하는 문학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창훈의 소설에는 각각의 살아 꿈틀대는 고유한 존재들의 결들을 살려내는 언어가 쓰인다. 집 옆의 밭을 일구는 ‘수’라는 여인의 진주 목걸이, 함께 학꽁치 회를 맛있게 먹었던 사내들의 입가와 정성스런 밥상을 내오는 할머니의 조근조근한 목소리,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위로하는 장에 갇힌 동박새들과 흰무늬를 가진 도도한 고양이의 꼬리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언어들이 있다. 이에 대해 평론가 황광수는 "물활론적인 세계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존재와 생명에 대한 유원한 명상으로 이"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창훈의 소설에서 인간과 자연, 존재와 사물들은 각각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깊숙이 받아들이고 있다. 세상의 끝, 섬에서 고향과 집을 되찾은 이에게 새로운 우주가 열렸다. 그리고 그는 그만큼의 가슴을 열어 따뜻한 세상을 부드럽게 포옹한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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