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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의 옴팡밭에 국화 한 송이를문학칼럼 35 - 제3회 제주4ㆍ3평화상 수상자 현기영의 <순이삼촌>
문학박사 송은정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창밖을 볼 때 마다 팝콘처럼 꽃망울이 터져가며 벚꽃이 피어나고 있다. 노란 유채가 가득 피어나고 하얀 꽃망울들이 터질 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아프게 남을 역사의 서막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해 섣달 한날한시에 그토록 많은 집들이 제사를 지내게 될 줄은. 제주섬사람들은.

지난 18일 제주4ㆍ3평화상위원회는 제3회 제주4ㆍ3평화상 수상자로 소설가 현기영 선생(78세)을 선정했다. 제주 4·3항쟁으로 인해 피 흘리며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는 그 싸락눈 내리는 섣달 제삿날마다 되새김질 되었지만 누구하나 부당한 죽음의 역사로 기록하지도, 소리 내어 말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978년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 발표되면서 제주 4.3이 폭동이 아니라 국가폭력에 의한 무고한 죽음의 한 페이지였음이 알려졌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일주도로변의 순이삼촌네 밭을 비롯한 네 개의 옴팡밭에 즐비하게 널려진 시체들의 처참함의 경위들은 그 어떤 매체들보다 영향력을 발휘해 힘없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되찾게 했다. 그러나 현기영은 이 4ㆍ3을 소재로 한 소설 <순이 삼촌>을 썼다는 이유로 1979년 군 정보기관에 연행돼 심한 고초를 겪었고, <순이삼촌>은 14년간 봐서도 읽어서도 안 되는 ‘금서’가 됐다.

이후 제주도 출신 작가 현기영은 평화운동가가 되어 제주4ㆍ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활동하면서 제주4ㆍ3연구소의 초대소장, 제주사회문제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4ㆍ3의 50주년, 60주년,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작품 뿐 아니라 온몸으로 진실을 드러내려 했던 그가 제주 4.3평화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올해 71주기를 맞는 제주 4·3항쟁 기념일이 일주일 남았다. 여순 10·19로 이어지는 국가폭력과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의 현장이었던 제주. 신혼여행지로 찾았던 아름다운 관광지 제주를 이제 그 아픈 역사 속에 희생된 이들의 해원의 살풀이를 위해 다시 찾아가 볼 예정이다.

국화 한 송이 고이 품고 <순이 삼촌>에서 묘사된 북촌을 찾아 군인 가족, 경찰 가족, 공무원 가족이 아닌 이들이, 결국은 늙은이들, 아녀자들, 어린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던 6백여 명이 죽었다는 순이삼촌네 옴팡밭에서 묵념이라도 하고 올 것이다.

“그때 혼자 살아난 순이삼촌 허는 말을 들으난, 군인들이 일주도로변 옴팡진 밭에다가 사름들을 밀어 붙였는디, 사름마다 밭이 안 들어가젠 밭담 우엔 엎디어젼 이마빡을 쪼사 피를 찰찰 흘리멍 살려 달렌 하던 모양입디다.”

“쯧쯧쯧, 운동장에 벳겨져 널려진 임자 없는 고무신을 다 모아 놓으민 아매도 가매니로 하나는 실히 되었을 거여. 죽은 사람 몇백 명이나 되까?” 하고 작은당숙이 말하자 길수형은 낯을 모질게 찌푸리며 말을 씹어뱉었다.

(중략)

밤에는 부락 출신 공비들이 나타나 입산하지 않는 자는 반동이라고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낮에는 함덕리의 순경들이 스리쿼터를 타고 와 도피자 검속을 하니, 결국 마을 남정들은 낮이나 밤이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중략) 당시 1구 구장이던 종조부님은 밤중에 내려온 마을 출신 폭도들로부터 식량을 모아 달라는 요구에 고개를 흔들었던 것이다.

“그렇게는 못 해여. 쌀을 모아 도랜 허지 말앙 차라리 빼앗앙 가게. 자진해서 쌀 모아 주었다가 냉중에 경찰에서 알민 우린 어떵 되는가. 숭시가 나고말고. 그러니 제발 부탁햄시메 쌀을 모아 도랜 말앙 억지로 빼앗앙 가게.”

이렇게 협조 못 하겠다는 말에 화가 난 폭도들은 그 자리에서 가슴팍에 대창을 내질렀던 것이었다. 같은 날 밤 용케 약탈을 면했던 철동이네 집은, 약탈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필시 공비와 내통함에 틀림없다는 엉뚱한 오해를 받아, 이튿날 경찰에게 화를 당했다. (분량이 길면 삭제할 부분)

(중략)

함덕으로 온 지 두 달도 못 되어 양식이 떨어진 피난민들은 들나물과 갯가의 파래나 톳을 삶아 멸치젓 국물에 찍어 먹으면서 간신히 두 달을 버텼는데 그제서야 소개령이 해제되어 향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부락민들이 마을에 돌아와서 맨 먼저 한 일은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일주도로변의 순이삼촌네 밭을 비롯한 네 개의 옴팡밭에 늘비하게 널려진 시체를 제각기 찾아다가 토롱(土壟)을 만들어 가매장했다. 석 달 가까이 방치되었던 시체들이라 까마귀밥이 되고 풍우에 썩어 흐물흐물 문드러져 탈골되었으니, 누구의 시체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옷가지를 보고 구별했는데 동(東)동네 누구는 제 아버지 시신을 찾아 놓고 지고 갈 지게를 가지러 간 사이에 다른 사람이 잘못 알고 가져가 버린 일도 있었다. 애어머니들은 대개 제 자식의 몸 위에 엎어져 죽어 있었는데 그건 죽는 순간에도 몸으로 총알을 막아 자식을 보호해 보려는 처절한 몸짓이었다.

 

‘삼촌’은 제주도에서 먼 친척을 부르는 말이며, 소설 속 ‘순이삼촌’은 25살에 사건을 경험한 인물이다. 남편을 잃고, 두 자식을 키우다 위에 묘사된 산간지방 소개령이 내려 마을의 온 집이 불태워지고 도민들이 학살당한 그 현장에 있었다. 총살의 현장에서 두 자식을 잃고 시체더미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혼자 살아남아 뱃속에서 자라던 아이 한명을 키우며 30년을 더 살아왔던 순이 삼촌. 그녀는 평생 경찰과 군인을 두려워하며 오랫동안 신경증에 시달리고 결벽증으로 자신을 몰아가다 결국 그 옴팡밭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이랑을 타고 아기구덕에서 아득히 멀어졌다가 다시 이랑을 타고 돌아오곤 했다. 호미 끝에 때때로 흰 잔뼈가 튕겨 나오고 녹슨 납탄환이 부딪쳤다.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어 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猶豫)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제주 4·3이 이렇게 소설로 쓰인지도 다시 41년이 지났다. 제주 4·3은 이제 특별법 제정 이후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역사적·사법적 진상 규명이 이뤄지고 있다. 일주일 후면 국가적인 추모행사가 진행되면서 나를 비롯한 많은 추모객들이 제주를 찾을 것이다. 같이 가게 될 여수, 순천의 여순10·19의 피해자와 희생자 유가족들은 상대적인 추모 열기에 아마도 가슴 한켠이 더 무거워져 돌아올 것만 같아 두렵기도 하다.

지난 21일 여순10·19의 세 명의 희생자 유가족들이 제기한 재심 재판 개시 요청이 받아들여졌다는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그동안의 여순 10·19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역사적 규명뿐 아니라 법으로도 인정을 해준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띠는 결정이었다. 이를 계기로 여순10·19의 부당한 희생자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니 앞으로의 재심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제주 4·3처럼 해원의 날이 좀 더 앞당겨질 터이니. 더불어 역사적·사법적 진상 규명 노력과 함께 현기영의 <순이삼촌>의 역할이 그러했듯 여러 형태의 예술로 형상화 된 여순10·19가 국민들의 가슴부터 열어주고, 진실의 눈물로 적셔주기를 기대해 본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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