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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36> - 생명을 담보로 한 4월의 폭력서정인 <철쭉제>
문학박사 송은정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4월, 벚꽃비가 흩날리며 지고 난 다음 길가 곳곳에는 사과꽃이 피고, 산자락에는 복사꽃이 피어나더니 어느새 화단마다 철쭉이 만개하고 있다. 지리산에서도 광양 백운산, 화순 화학산 등 곳곳의 산에서는 철쭉제가 이번 주말부터 열린다고 한다. 쉴 사이 없이 꽃들이 피어나고 먼 산빛은 새순물이 들어 하루가 달라진다. 새로운 생명은 부지런히 무언가를 지우고, 무언가를 떨구며, 무언가를 깨고 나온다.

이 4월이 유독 아프다. 제주도 한라산 곳곳에 뚫린 동굴 속에서의 죽음들을 떠올리는 4·3항쟁이 그랬고, 독재자를 끌어내린 4·19 혁명도 피의 냄새가 배어있고, 노란 리본의 기다림을 남기고 바닷속으로 사라진 4·16 세월호를 추모하는 것도 아프다. 또 다시 4월, 여전히 누군가는 무언가에 억눌리고, 분노하며, 용기를 내고 있을지도 모르며 혹은 지독하게 사랑에 빠지거나 이별의 고통에 가슴 아파 눈물 흘리며 꽃들을 바라볼지 모른다. 그 잔인하다는 4월의 한가운데를 나고 있는 중이다.

의심하지 않았던, 계속되리라 믿었던 견고한 일상들과 삶의 질서들이 무너지는 사건들. 그 사건들은 고요히 가라앉혀 두었던 사실들, 세상사의 유한함과 인생의 격랑들, 아직도 평등하지 못한 인간 세상 등을 부상시키고, 부각시켜버린다. 저 선명한 무리를 이루며 피어난 철쭉처럼.

소설 <철쭉제>는 봉건적 질서의 해체와 전쟁이 가져다주는 극한 행동들과 원한, 그것의 해소를 다루는 문순태가 쓴 소설도 있고, 순천 출신 소설가 서정인이 쓴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서정인의 <철쭉제>를 살펴볼 것이다. 서정인(徐廷仁, 1936~ )은 본명이 서정택이며 순천중학교와 순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김승옥과 이청준보다 5년 전인 1955년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 62년에 복학했으니 김승옥 등과는 대학에서 만나기도 했을 순천이 고향인 작가이다. 이후 1992년 전남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2002년까지 전북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서정인 소설은 관념적인 내용을 즐겨 다루면서도 그것을 대화로 표현해 내면서 소설 언어에 각별하게 신경 쓰는 작가이다. 서정인은 “내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더 재미있어요. 소설이지만 청각 예술이기도 해요.” 라고 말하기도 한다. 소설을 ‘청각 예술’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작가 서정인의 소설은 생동감 있는 표현들 때문에 읽고 나면 한편의 드라마를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일상의 별스럽지 않은 일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눈앞에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대화들이나 문자들의 음성적 리듬감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인물들의 목소리는 마치 배우의 목소리처럼 뚜렷이 형상화된다.

사실 소설 <철쭉제>는 이렇다 할 줄거리라고 할 것이 없다. 20대의 두 처녀와 30대 50대 중년 남녀가 지리산에서 우연히 동행하게 된다. 그들은 철쭉제가 열린다는 것도 모르고 지리산을 찾았다가 등산객에 밀려 차를 놓치고, 묵을 곳을 찾는 데 애를 먹는다. 그들은 어떤 특별한 사건이 없이 장터목, 세석, 한신계곡, 백무동 등으로 산행하며 이야기들을 나눈다. 속마음을 드러내거나 무엇인가 새로운 사실을 이끌어가는 대화가 아니라 현실 세계의 한심스러움 또는 뒤틀린 배면을 해학적으로 비판한다. 시원하게 내뱉는 비판이나 현실의 이면 뒤집기는 가볍고 재치 발랄한 20대 여대생들의 말장난 같으면서도 기발해서 독자가 금방이라도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같이 맞장구치며, 대화에 끼고 싶어지게 한다. 가볍고 유치한 듯 보이지만 하나하나 붙잡고 곱씹어 볼만한 삶의 철학이 짙게 배어있다.

 

“악은 악이 물리친다. 선은 악을 물리칠 수 없다.” 현애가 말했다.

“바로 그건가 봐.” 철순이가 말했다. “악을 물리치는 것이 선이다. 악이 악을 물리친다. 즉 악이 선이다.”

“무슨 소리들이야?” 장씨가 화를 내고 말했다. “흉악한 범법자를 교회에 데려다 놓고 안수기도라도 하란 말이야?”

“그럼 폭력이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현애가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럼 목탁만 두드리고 있으면 사회가 폭력으로부터 보호된다는 얘기야?” 장씨가 말했다.

“무슨 폭력?” 철순이가 말했다. “전 지금 예수의 방법이 옳으냐, 시저의 방법이 옳으냐를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설령 시저 군단의 방법이 옳다손 치더라도, 그 방법이 지나치면 그 억지가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하물며 지나치지 않을 때에도 그 도덕성이 모호하다면, 지나칠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우리, 상식적으로 얘기를 하지.” 장씨가 목소리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말했다. “질서유지라든가, 선량한 시민 보호라든가, 하는 건 어떻게 되지? 아니, 근본적으로 얘기를 해볼까? 흉악한 폭력을 응징하는 힘이 왜 폭력이지? 폭력을 물리친 힘이 왜 그 폭력과 똑같은 의미의 폭력이 되지? 물론 힘이라는 점에서는 둘이 같을지 모르지만, 방향이 다르지 않어. 하나는 정의 쪽이고 하나는 악덕 쪽이지 않어? 악의 힘을 이기기 위해서는 정의에게도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힘없는 정의는 구두선이야.”

(중략)

“방향 빼고요. 방향만 다르지 둘의 속성이 같다는 거 아니에요?”

“뭐가 같어? 정의의 힘은 힘이고 악덕의 폭력은 폭력이야.”

“정의의 폭력은 힘이고, 악의 힘은 폭력이다,고 해야 어울리겠죠?” 철순이가 말했다.

서정인 <철쭉제>의 인물들은 자꾸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각자의 고민들, 각자의 삶들, 각자의 사유가 있다. 이야기도 뭉쳐지지 않고, 불쑥불쑥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어쩌면 독자는 서로 말이 안 통하는 듯한 이들을 대신에 대화에 참여해 화두를 붙잡아 다시 꿰고 살을 붙여보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너무 아픈 4월의 한가운데에서 어쩔 수 없이 악의 힘인 폭력에 저항하여 정의의 폭력인 힘을 발휘하다가 희생된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폭력, 대상에게 가하는 그 강렬한 개입이 변화를 추동해 낼 힘이 될 것인지 생기를 뺏는 폭력이 될 것인지 섬세하게 가늠해야 할 것이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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