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송은정 문학칼럼
<문학칼럼 37> 세상을 폭로하고, 나는 사라지고이청준 문학 소고(小考)
문학박사 송은정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말하는 것이 괴롭다. 속절없이 내뱉어진 말들은 올가미가 되어 되돌아오고, 사로잡혀 버둥대다 벗어나기 위해 또 부질없는 말들을 뱉어내고야 만다. 말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 어휘 자체가 아닌 상황과 맥락, 담론들 속에서 암시 효과를 자아낸다. 그것은 주체들을 억압하는 상징권력의 대표적 도구가 된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괴롭다. 어떻게든 진심을 전달하거나 항의하고 싶어 안달한다. 그러나 말은 절대 그것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수 없는 실패의 경험들 속에서 뼈저리게 습득했다. 그래서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눈빛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가 닿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들의 파장 역시 종종 방향을 잃고 헤매거나 안착할 곳을 찾지 못하지 않던가. 실패하더라도 말하기에 대해 노력해야 하는지, 만나고 접촉해야만 확인할 수 있는, 그럴 수 없을 때에는 온전히 가 닿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궤적을 남기지 않는 전송을 계속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작가 이청준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청준은 일찍이 『언어학서설』 연작을 중심으로 여러 작품들을 통해 언어와 문자가 주체를 장악하고 통제하려는 힘을 인식해 왔다. 더불어 이를 해체하기 위한 대항적 방법 또한 말하기와 글쓰기라는 언어와 문자의 힘을 제시해 왔다. 심문관의 취조, 소문이나 떠도는 말, 사장의 전화나 회사에서의 통지서, 예언과 역사가 기록한 것들은 인물을 직·간접적으로 옥죄어 가며 그의 소설 속 독특한 주체를 생성해 낸다. 이 주체는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그 소문을 확인하거나 부정하기 위해, 혹은 그 말과 문자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인식하며 탈주하기 위해 하나의 사건을 두고 매번 새롭게 다시 말하기를 시도하며, 힘겨운 증언하기를 반복하며 고정된 것들의 틈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이청준은 일면 보수적인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 그는 불가지론을 기저로 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도 진실된 하나의 답을 찾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세상의 변혁과 혁명을 부르짖기 보다는 그 세상이 보여주는 현실들을 더 충실히 들여다보며 결국은 그 현실의 어찌할 수 없음을 수긍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그의 소설에는 세상과 충돌하는 격정적인 인물보다는 그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주눅들어 하거나 미치거나 죽어가는 인물이 대부분이다.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빼앗기고, 자기부재를 욕망할 수밖에 없고, 자아 망실증을 앓으며 스스로를 증거할 수 없는 인물들은 분명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현장 상황이나 세상을 의심할 것 없는 하나의 적으로 삼아야 했다. 그러나 이청준 소설 속 인물들은 세상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이청준이 더 지고한 주체의 자유를 원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 앞의 막다른 길, 자신을 둘러싼 벽을 한계로 인정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의 고집일 수 있다. 그가 인간에 대한 낭만적 혹은 낙관적 사유를 하는 작가라는 뜻이다. 그는 인간이 주체로서 행할 수 있는 것들에 눈을 돌린다. 그는 세상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세상이란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가 그 의지를 발휘하며,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애물 쯤으로 취급한다. 그의 소설 속에서 진정한 적은 그 벽을 타 넘지 못하는, 그 벽 앞에서 투지를 발휘하지 않고, 무릎 꿇고, 돌아서 가려는 자기 진실에 충실하지 못한 나약한 인간 스스로이다.

그의 소설은 수동적이고 비자발적인 상황들 속에 내몰린 인간의 현실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온갖 담론들과 규율들의 실제들을 폭로하며 그것이 인간을 얼마나 좀먹어 가며 존재를 상실하게 하는지 적나라하게 부각시킨다. 키 작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을 인식시킨다. 그 현실은 하나의 매트릭스와 같다. 그리고 그 매트릭스는 말과 문자로 조직되어 주체를 꼼짝할 수 없게 배치하고 감시한다. 그래서 그 주체는 세상과 직접적으로 맞설 수 없다. 너무나 강한 전짓불이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짓불은 주체 내면 깊숙이까지 침투해 내재화되어 숨을 곳을 찾을 수 없다. 그 전짓불 앞에서 주체는 죄인으로 명명될 수밖에 없다. 자유를 잃은 꼭두각시 같은 자기 망실증에 빠진 죄수로 숨죽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주체가 파놉티콘(원형감옥)에서 자유를 되찾는 방법은 늘 강한 써치라이트 뒤에 숨어서 모든 것을 감시하는 간수의 눈을 멀게 해 숨을 틈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간수의 전짓불보다 더 강한 빛으로 간수를 노출시키며 그의 눈을 멀게 하는 방식을 쓰는 것이다. 간수의 행태가 낱낱이 드러나 스스로 죄의식으로 흔들리는 틈을 노리는 것이다. 철저히 자신을 옥죄는 세상을 폭로하는 방식이다. 인간을 비판하고, 단죄하며, 낙인찍고, 규정하는 그 말과 문자로 만들어진 상징권력들을 내파할 수 있도록 그들의 방식과 똑같은 말과 문자의 힘을 반사시키는 것이다. 문학의 말과 문자가 지닌 암시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체는 자신의 말과 문자에 힘을 믿어야 한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자신 내부의 신성, 잠재력을 믿는 일이다. 그것은 믿음의 영역이자 하나의 종교의 영역이다.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폭력과 피를 부르는 혁명의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세상과 인간 스스로를 파괴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자 결과로 반복되거나 끝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신성을 지닐 수 있는 존재라고,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로 한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창조자가 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진정한 적인 자기 진실에 당당하지 못한 주체를 죽이는 길 뿐이다. 그리고 거대한 덩치를 지닌 존재자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키작은 자유인으로 자기 진실을 고수할 수 있는 믿음의 존재로 전환되어 신으로 좌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진보인 것이다. 세상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는 현실을 바꾸려 하지 않는 보수주의자이지만, 결국 그 현실을 구성해내고 배치하는 근본적인 원인체이자 주조자인 주체를 전환시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진보주의자이자 혁명가이며 일면 구도자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주체는 자기 연민을 경험하게 된다. 물리적인 저항과 발버둥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그 조악한 방법조차로도 자신을 증거할 수 없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기에, 자신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재와 소실을 증거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즉 그는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이력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잠재력을 믿는 것, 확신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 확신은 상황의 축이 바뀌었을 때 또 다른 폭력이 되고, 또 다시 죽여야 할 자신으로 되돌아 올 수 있기 때문에 그는 그 믿음의 결실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말할 수 없게 된다. 그저 그 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주체로 변화해 가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매번 사라지는 방식으로 증거할 수밖에 없는 구도의 과정이다. 그러니 그는 영원히 말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자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성찰의 과정들은 부끄러워하고 머뭇거리는, 작가 자신을 닮은 인물들로 귀결된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저작권자 © 여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