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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생생합니다 - 2<기획연재 - 여순10·19의 기억 1-2 >

* 여순사건 피해 유족인 황순경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구 술 자 : 황순경(1939년생, 81세, 당시 9세) - 現 여수유족회 회장>

작가 송은정 (문학박사,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제 고향은 지금의 여수시 여천동에 해당하는 쌍봉면 내동부락입니다.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가 된 지금의 쌍봉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지요. 우리 고향은 황씨의 집성촌, 자자일촌으로 마을 전체 80호 중 65개 가구의 성이 황씨였습니다. 그러니 이웃들이 거의 친척이었지요. 이 마을의 친척들 중 3명이 여수역에 근무하고 계셨습니다. 그중에 한 명이 저의 형님입니다.

아침 기온이 뚝 떨어지기 시작하며, 나날이 산빛이 초록을 잃어가던 10월 24일.

이날 아침 어머니는 아침 안개 피어오르는 들녘을 맴도는 까마귀떼를 보았고, 아침상을 마주하고서 친정집 부음을 들어야했습니다.

뽀얗게 예쁘다는 순천고산병원의 간호사랑 약혼을 한 25살 남동생이 운명을 달리한 지 이미 3일이 지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종현아! 종현아! 아이고, 아까운 거. 장가도 못가보고......라는 말을 꺼이꺼이 터진 울음과 함께 수도 없이 반복하셨습니다.

아무리 출가외인이라지만 어찌 소식이 이제야 왔는지 원망스러워했고, 장례를 치르러 가기도 여의치 않은 요즘의 뒤숭숭하고 무서운 시절을 한스러워하셨습니다.

최근 며칠간 누군가는 공으로 나눠주는 쌀을 받아왔다고 하고, 새 고무신을 자랑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하루 전인 23일에는 오전부터 여수항 쪽에서 총소리가 맹렬하게 들려왔다고 하고, 하늘에는 두 개의 엔진을 가진 미국 비행기가 날아다니기도 했습니다.

14연대 군인들을 잡으려고 해안경비대 함정들이 여수만을 둘러싸고 포진해 있다고 했습니다. 한, 두 명씩 보따리를 싸고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았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형님도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퇴근해 와서는 급한 저녁을 먹고, 고운 새색시도 혼자 남겨두고 마을 청년들을 만나 세상이 뒤바뀌었다고 두런두런거리고는 했습니다.

기차역에서 근무하는 형은 며칠 전, 20일부터 기차에 군인들을 실어 날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형이 근무하는 곳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간 군인들 중 누군가가 쏜 총에 우리 외삼촌이 돌아가신 것일 거라는 걸 형은 차마 어머님께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외삼촌은 순천의 경찰이었습니다. 순천 장대다리에서 14연대를 만나 작전을 수행하다가 그 푸르렀을 청춘을 마감한 것이었지요.

형은 가장답게 어머니를 위로하며, 자신이 오늘 근무 중에라도 기차를 타고 다녀오겠다며 눈물을 훔칩니다. 붉어진 눈시울을 숨기려 얼른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어머니를 잘 챙기라며 무거운 걸음을 옮겨 여수역으로 출근했습니다. 나는 형이 아침마다 출근하는 모습을 자랑하고 싶어서 사립 밖에까지, 정자나무까지 나와 형을 배웅합니다. 그날따라 형은 몇 번을 뒤돌아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출근한 형의 퇴근이 늦습니다. 형이 철도공무원인 두 명의 또 다른 친척 형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언제나 비슷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번듯한 직장을 가진 형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셨지요.

빠르게 어둠이 내리고, 가을밤이 깊어갈수록 동생의 부고에 가슴을 뜯던 어머니는 어느새 울음도 뚝 그치고 아들 걱정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시집온 지 일 년이 채 안 된 형수님은 표 안 나게 사립문을 힐끗거리며 목을 빼고는 합니다.

우리 형은 우리 집에서 아버지나 매한가지입니다. 결혼한 지 1년이 채 안 된 신랑인 우리 형님은 우리 2남 1녀, 3남매 중 맏이인데 12살 누이와 9살 막내인 저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 23살인 어른이었습니다. 거기다 아버지도 3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형님은 우리 집안의 가장이었지요.

고생만 하시다 병마에 시달리며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원망하듯 언제 한번 안 그런 적이 있었는가 싶은 그 한스러운 시절은 아직 해방되기 전이었지요. 일본이 전쟁에 눈이 시뻘게져서 전쟁의 소모품으로 아무나 잡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셨다가 해방이 되기 바로 직전에야 이질에 걸려 아픈 몸을 이끌고 만신창이가 되어 귀국하셨습니다. 하룻밤도, 어느 한순간도 편안해지지 못할 만큼 병마에 시달리시던 아버지는 돌아오신 지 3개월 만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조국은 해방이 되었다는데 아버지는 죽음의 볼모가 되어 또 다른 저 세계로 떠나셨지요.

그러니 마지막으로 보았던 힘없고 아픈 아버지보다야 제게는 형이 더 멋진 아버지인 셈이었지요. 번듯한 장남은 남편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머니께는 든든한 바람막이였을 테고, 물론 앳된 형수님께는 다감한 지아비였겠지요.

(다음 호에 계속)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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