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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생생합니다-5
작가 송은정 (문학박사,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객사한 형은 집안으로 모실 수 없었고 마을 입구 논에 멍석을 깔고 눕혀놓았습니다. 집성촌이었던 우리 마을은 거의 친척이었고, 모두가 형의 시신을 둘러싸고 통곡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광경이 생생합니다. 형은 그 23살 젊은 몸의 한가운데인 배꼽, 세상에 나오기 위해 몸을 키웠던 바로 그 근원의 자리에 피를 흘리며 죽음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형의 생애 중 가장 빛나는 한가운데를 맞춰버린 총알은 검붉은 핏빛으로 빛을 거둬갔고, 죽음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각인시키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우셨을까요. 세 사람이 같이 오다가 똑같이 위협을 받았는데 왜 형님만 돌아가셨을까. 자꾸만 자꾸만 생각해 봅니다. 보지 못했던 그 순간들을 수도 없이 떠올리며 상상해 봅니다. 형님이 그들 말처럼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설령 그랬다 해도 조목조목 따지며 판결을 내린 다음이어야 했을 테지요. 무기를 들고 공격을 하거나 저항을 한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저는 이유를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키가 훌쩍 크고 눈썹도 짙고 눈이 크신 우리 형님은 못 하는 것이 없는 세상 제일 멋진 형이었지요. 다만 눈이 커서였던지, 우리 형은 실상 겁이 아주 많은 분이셨나 봅니다. 손들라 했을 때 가만히 손을 들고 있었으면 살았을 텐데 도망을 가버린 것입니다. 우리 형이 살아오신 분들과 달랐던 점은 그 행동 하나밖에 없었으니까요. 왜 손을 들고 가만히 있지 않고, 왜 말을 듣지 않고 도망을 쳤을까요? 저는 지금도 묻고 또 묻습니다.

살려는 마음에 그러셨겠지요. 왜 안 그렇겠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날 아침에는 외삼촌이 저처럼 겨눠진 총부리 앞에서 쓰러져 운명을 달리 한 것을 알고 출근한 날인데. 게다가 철도원이었지만 군인들에게 잡히면 그 역시 반군에 가담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군영을 장악하고 순천으로 진격하려는 14연대는 20일 아침부터 여수역으로 몰려들었고, 철도공무원이야 별도리 없이 그들을 기차에 태웠으니까 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그랬겠지요. 잡히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겠지요. 자신의 휘파람 소리나 노래에 맞춰 늘 고개를 까딱이거나 몸을 흔들며 같이 흥얼거려주는 새색시에게 어서 돌아가야 하고, 건사해야 할 홀어머니와 동생의 곁을 지켜야 했으니까요. 어찌되었든 우선 살아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겠지요. 운동은 자신 있었으니 어둑해지는 틈을 타서 재빠르게 움직이면 피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지 모릅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지금도 종종, 그냥 살아오신 분들과 똑같이 손을 들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분들처럼 총대로 수없이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라도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원망을 해보기도 합니다.

나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슬픔이란 것이 무엇인지 미처 모르고 그저 엉엉 울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셨습니다. 그 단식은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근 한 달을 딱 물만 마시고 울면서 신음하셨습니다. 살 수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일본에 끌려가 계셨던 아버지를 대신했던, 그리고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언제나 든든하게 곁을 지키던 장남은 어머니에게 세상 전부였을 터인데. 그 세상 전부를 잃었으니 삶의 자리가 없어진 것과 다름없었지요.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인가. 여천군의 인물이라고 할 만큼 똑똑한 아들, 못하는 것이 없던 아들이었습니다.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뭐 하나 못하는 것이 없었지요. 심성은 또 얼마나 반듯했던지 청년회장을 하면서 중학교를 못 간 마을의 젊은이들을 마을 회관에 모아놓고 공부도 가르치고, 집에 있는 유성기를 틀어놓고 노래도 가르치고 했던 이가 아닌가.

󰡒아가, 아가󰡓

애가 끊어질듯 아들을 불렀고, 고개 숙여 어깨를 흐느끼는 며느리를 끌어안고서 몸부림쳤습니다.

󰡒자식 하나도 세상에 못 내놓고. 세상 천지에 니가 어떤 아들인데.󰡓

제 한에 겨워 까무룩 정신을 잃고는 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님께 말씀드리지 못한 비보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형님을 찾으러 집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여수에서는 또 한 명의 친척이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제 고모의 아들인 고종사촌 형님도 이 한날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까마귀가 떼로 날 수밖에 없었던 날인가 봅니다. 차마 조카까지 한날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 고종사촌 오성재 형님은 얼마 전 어린 딸을 안고 놀러왔었습니다. 지금 여수시민회관 자리 인근에 있었던 굴 껍데기를 갈아서 시멘트처럼 가공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촌형님에게는 찬 갯냄새와 비릿한 갯것들 냄새가 섞여서 났습니다. 25살의 젊은 가장은 그날도 예의 그 냄새에 땀내까지 범벅된 채로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하지요. 형님도 그날 아침 까마귀떼를 보았을까요, 그 소리를 들었을까요. 어떤 운명의 조짐을 느끼기나 했을까요? 누구보다 힘차게 처자식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던 그 젊은 가장은 영문도 모른 채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중첩된 죽음의 소식에 저도 모르게 사촌 형님의 어린 딸과 형수님 얼굴부터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형을 잃은 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연민이 가장 우선하는 감정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참담하며 불행한 시절인지요.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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