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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생생합니다<기획연재 - 여순10·19의 기억 1-6 >
송은정 (문학박사 순천대 여순연구소)

9살이었던 저 역시 정말 힘들었습니다. 나에게는 진짜 아버지도, 아버지의 대리자도 사라졌습니다. 더불어 집안의 젊은 남자들이 그다지도 일찍 떠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의 사라짐처럼 다가왔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의 죽음, 한 마을에서 똑똑하게 앞장섰던 이들의 죽음, 한 나라의 젊은이들의 죽음은 곧 앞날의 쇠락으로 이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그 한 명 한 명의 소중함의 무게만큼 남은 이들은 그 몇 배의 고통을 감당해야 했으며, 고삐 풀린 폭정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게지요. 지나온 뒤이니 더 확신하며 말합니다. 남겨진 이들의 삶이 얼마나 가난하고, 처연했는지. 그러니 저는 그 젊은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그래서 남은 이들의 삶의 생기마저 탈취한 그 시절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대해서 꼭 말하려고 합니다.

돌아가신 형님을 위해, 무엇보다 겹겹의 상실을 겪고서 정신을 놓고 있는 어머니를 위해 마을 친지들이 씻김굿을 벌였습니다.

씻김굿은 밤새도록 이어졌습니다. 신대를 잡은 우리 형수님. 지금 비행장이 들어선 신풍리 신상 부락에 오씨들이 사는 마을에서 온 형수님은 기진해져서 신대를 잡았습니다. 나는 까무룩 졸음에 겨워 있을 때 문득 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났지요. 형님의 휘파람 소리다. 그리고 형님의 목소리. 며칠 전만 해도 늘 정겹게 들었던 형님의 여전한 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형님을 찾습니다. 두리번두리번 형님의 모습을 찾습니다. 

아, 그 소리들은 신대를 잡고 몸을 흔드는 형수님의 몸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던가? 형수님의 몸에서 형은 여전하게 말하고, 노래하고,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하필 그것이 숨결들이 빚어내는 선율이었고, 모든 감정들을 섬세하게 담아내는 노래였기에 형은 우리 가까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만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문자나, 어떤 말보다도 뚜렷하게 형님의 형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형님과 닮을 수 없었던 형수님의 왜소한 몸집이며, 소리 한번 크게 내보지도 않던 형수님이라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런 형수님에게서 형님의 형상이 뚜렷하게 보이는 그 순간들이 더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리고 형수님을 부여잡고 몸부림을 쳤고, 마당을 둘러싼 동네 사람들도 다 혀를 차며 기가 막히다고 탄성을 터트렸습니다. 그 기막힌 순간에 정말 그 많은 사람들은 진짜 저처럼 형을 목격한 것일까요? 형은 진짜 그날 그곳으로 내려와 씻김질을 다 하고 가볍게 떠날 수 있었을까요?

남은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나 봅니다. 형수님은 말을 잃으셨고, 어머니는 목숨 줄을 놓으시려 했습니다. 누나하고 나는 두려움 속에서 그것들을 찾고,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집안의 작은아버지와 동네 친척들도 돌아가며 찾아와 위로를 했지만 어머님이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시기까지는 다섯 달이 걸렸습니다. 그만하면 잘 견디신 것이지요. 그 큰 상실을 수습하는데 다섯 달이면 정말 잘 견디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저나 제 누이에게 그 시간은 정말 두렵고 긴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는 필연적으로 한 가정의 어머니마저 집 밖으로 내몰기 마련이니, 우리는 기댈 안락한 바람벽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셨지만, 세상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은 길게 이어졌지요. 시집을 와서 겨우 1년 만에 지아비를 잃은 형수마저 세월이 흘러 재가를 해 나가버렸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작으나마 농사로 자급자족 하면서 형님 월급으로 어려움 없이 살다가 참담했겠지요. 작은아버지 도움이 컸고, 동네 친지들도 늘 곁에서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저는 국민학교를 마치고 인천 이모 집으로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누님이 헤쳐 나가야 할 세월 역시 험난하기는 매일반이었습니다. 누님은 그 뒤로도 5년 여의 세월을 어머님이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슬픔을 이겨내시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누님은 일도 잘하고, 말씀도 잘하고, 성격도 대차고, 활달했습니다.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려고 그랬던 게지요. 어머님도 힘을 되찾고 누님이 19살이 되자 결혼시켰습니다. 어머님은 가족이 많아 흥성한 가정에 누님을 보내고 싶어 하셨습니다. 

배불리 밥 먹고 살라고 어머님이 고른 혼처는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시부모가 층층이 살아계시고, 12형제가 북적되는 부잣집이었습니다. 매형 될 사람은 12형제의 맏이었고, 누님은 그 가정의 살림을 다 꾸려나가셔야 했지요. 집안일을 돕는 2명을 포함해 20여 명의 식구들을 입히고, 먹이고 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눈뜨자마자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그 대식구들 음식을 해대고, 얼음장 같은 물에 손을 담그고 빨래를 해대는 것이 어찌 그냥 당연히 살아내는 것이라고만 하겠습니까, 하루하루가 고행의 수도 생활과 같은 것이었을 테지요. 나를 보듬고 서럽게 울던 누이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어머님은 또 어찌 그런 곳으로 누님을 보내셨겠습니까. 너무도 많은 죽음을 보아왔고, 감당하기 어려운 가족들의 죽음이 가져다 준 슬픔과 두려움이 더 많은 생명을 갈구하게 했겠지요. 그리고 그 힘겨움의 긴 터널을 지나올 수 있었던 것은 곁을 지켜주는 온 마을 곳곳에 있는 친척들의 힘이었음에 언제나 감사해 왔었으니, 함께 할 누군가가 많은 것이 세상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큰 힘이 된다고 믿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음력 9월 22일, 우리 고향에서는 어느 때보다 제수용 고기 값이 제일 비싸지는 때이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아들의 제사상에 언제나 그 자식이 제일 좋아하던 낙지를 정성스럽게 마련해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가슴에 묻은 자식의 영혼이 찾아왔거니 싶으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읊조리십니다. 형의 마지막을 수습했던 어른들의 수고를 잊지 말라고. 못다 푼 응어리들이 뭉쳐져 무겁디무거워진, 키도 크고 건장했던 형의 젊은 몸을 그 밤에 가마니에 싸서 10리 길을 다녀온 것은 아무나 못한다고. 그것이 다 한 마을에 살며 끈끈하게 정을 나눈 이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나는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무고한 젊은 자식이 허망하게 스러져갔음에도,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삶을 놓아버리고 싶었음에도 살아남아서 지켜야 하는 것들이 또 있었던 어머니. 또 다른 남겨진 자식들을 위한 영혼의 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서럽고 고단한 시간을 견디게 했던 그 힘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우리 어머님은 생생하게 기억하며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무거운 죽음의 몸뚱어리 역시 산 자들이 힘을 합쳐 떠메고 돌아와야 한다고. 한을 품고 죽은 영혼들을 깜깜하고 거친 덤불 속에 그대로 두고서 길을 떠날 수는 없다고. 10리가 되었든 100리가 되었든 산 자들이 힘을 합쳐 모셔오고, 씻김질 해주어야 한다고. 그래서 그 영혼들이 못다 하고 간 억울한 사연들을 산자와 함께 풀어내고 모두가 해원해야 한다고. (끝)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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