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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이름 - 4<기획연재 - 소설 여순10·19의 기억 2 >

* 여순사건의 피해자와 그 유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

작가 송은정 (문학박사,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할머니는 살아생전 그녀의 상처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 육체적 아픔이었든, 정신과 마음의 고통이었든 입 밖에 꺼내놓으신 적이 없다. 오랫동안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큰아버지나 사촌형 역시 할머니는 그런 것을 딱히 드러낸 적이 없는 것은 물론 호탕하기까지 해서 할머니의 슬픔이란 것을 느낄 수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큰아버지가 남긴 자료와 목격자 증언 자료들, 여순사건이라고 정리된 책들과 여순항쟁 혹은 여순민중항쟁이라 역설하는 강좌들을 통해서 할머니의 이야기되지 못한 슬픔들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정치와 철학과 문학으로 혁명을 꿈꾸다 33살의 나이로 생사를 알 수 없이 사라진, 죽음과 삶을 유보하고 있는 할아버지 김유섭도 71년을 흐르고 건너 다시 이곳에서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이를 악문 침묵의 뒤에 두 차례의 전기고문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할머니의 젊은 날이. 지금에서야 그때 보았던 할머니의 거울 속 검은 입이 온갖 소리들로 가득 찬 지옥 구덩이로 되살아난다.

쫘아악. 허어푸.

“불어! 어디 있어?” 잔인한 웃음이 따라붙는 소름끼치는 목소리.

“그놈 어디 있어!” 증오를 감염시키는 저주에 가득 찬 협박.

지이잉 전기 흐르는 소리와 함께 연이어 터져 나가는 폐부를 찢는 비명.

팽팽하게 끊어져가는 신경들과 그를 따라 곱아진 근육들이 튀겨지며 제멋대로 부딪치고,

빠득빠득 이가 악물리거나 덜그덕 맞부딪치는.

새된 비명에 가락이라도 붙이듯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다섯”이 셈해지고.

소리의 짧은 틈으로 그어지는 부글거리는 입거품과 하릴없이 흘러내리는 오줌줄기의 궤적.

규칙적인 경련을 따라 튕겨지는 몸이 내는 공포의 매트로놈 소리.

“불어!”

입을 앙 다물고 고개를, 온 몸을 저었을 그녀의 이가 빠드득 갈린다.

공포와 두려움 말고 감각하거나 인지할 무엇이 있을 수 있다고 불라는 것일까. 실제 그녀는 간밤 어둠 속에서 벌벌 떨며 뒤안 나뭇단 속에 남편을 밀어 넣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는지 모른다.

온갖 것을 다 떠올려야 하는 것은 그녀의 남편 김유섭의 몫이다. 불과 3일전인 1948년 10월 20일. 김유섭은 드디어 그의 첫째 아들 7살 정관에게 달라진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정치에 있단다. 너의 이름이 정관인 이유이고, 그것을 직접 확인해보자꾸나 소리치고 싶었다. 기다렸던 해방과 함께 그 이후에 대한 모색이 있었어야 했다. 해방이 되자 찬탁이니 반탁이니, 애국이니 양심이니 하면서 정당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황국신민이라는 획일화된 식민지인이 아니라 스스로의 국가를 세우려는 대안들을 내세우며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것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과정이고 진짜 정치의 시작이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토의의 장에서 이뤄져야 하는 정치는 효율의 측면에서 밀리고 있었다. 엄혹한 현실의 당면 과제들이 쌓여있었고, 청산되지 못한 제국주의가 얼굴만 바꾼 채 지배하고 있었다. 1946년 6월 3일자 신문에는 <청송에서 200여 명이 아사. 사경을 헤매는 농민이 2천여 명> 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1947년 가구당 생계비 지출은 22,518원인데 대학 교수들 월수입이 2,125원이니 딱 그들의 월급의 10배가 적자가 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셈이었다. 소매 물가지수가 해방 이후 220배 이상 인상되었는데 평균 임금지수는 80배를 밑돈 상태에서 높은 물가고, 실업사태, 식량난이라는 3중고를 겪어야 하는 혹독한 시절이다. 청산되어야 할 것들은 미적미적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생존은 벼랑 끝에 달렸으니 전국에서 소요와 시위가 계속될 수밖에. 밥그릇이 텅텅 비어있는데 그 많은 의견들을 수렴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정치는 불한당의 전쟁터로 전락해갔다. 권력을 잃기 싫은 이들이 남한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반대하는 제주도민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제주도민을 진압했던 경찰들은 일제치하에서 민중 보다 제국의 치안을 위해 충성했던 순사들 면면 그대로여서 경찰은 여전히 민중 제일 가까운 곳에서 가장 무서운 순사로 남아있다.

일제 때부터 좌익 엘리트였던 김유섭은 광주에서 시계방을 하며 고장난 시계를 고치듯 세상도 한눈에 다 들여다보며 고쳐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남한단독 선거로 수립된 이승만 정권이 군 내부를 중심으로 좌익색출을 시작했다. 몇몇 알만한 이들이 잡혔다는 정보가 시시각각 들어오는 가운데 문관이라 이름붙일 셋째 아이가 수태된 것을 알았다. 남편의 부산한 바깥 활동들에 대해 모른 척 하려고 무던히 노력하던 부인이 임신과 함께 불안 증세를 보이며 점점 예민해졌고, 연일 광주를 떠나자고 보챘다. 결국 그는 군말 없이 짐을 싸서 광주를 떠나 처가가 있는 곳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기와집을 한 채 사서 다시 시계방을 연 곳이 하필이면 1948년 순천이었다.

어떤 화가의 말처럼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배반할 수 있었더라면 김유섭은 행복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일 오전 순천 동천 장대다리에서 울리는 총소리가 그를 다시 되돌려놓았다. 좌익 사상을 가진 여수 14연대가 봉기해서 순천까지 입성해 장대다리에서 벌교・보성・고흥・장흥・광양・구례・곡성에서 지원 나온 경찰관 260여명과 맞붙어 승기를 굳히고, 경찰을 지원하러 온 4연대가 오히려 봉기군에 합류해 죽도봉, 봉화산, 순천고와 조곡삼거리까지 진격해 제국주의자의 순사였던 경찰들을 장악했다. 누구나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그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는 때였다. 바로 그날 낡은 체제를 단절시키기 위해 앞장설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일본제 소총이 지급되었다. 20일 그 밤은 물밑에 숨어있던 조선민주여성연맹이며 인민위원회가 화톳불을 피우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펼쳐냈다. 김유섭은 여전히 불안해하는 부인과 어린 자식들을 의식하며 총을 드는 것은 피했지만 터질 것 같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광주에서도 종종 금고를 열어 한 움큼씩 돈을 빼냈던 것처럼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순천읍내로 입성한 사상적 동지들에게 거한 밥상을 내놓는 것이었다. 그는 그들 무리에 끼어 밤새도록 재건한 인민위원회에서 할 일들을 논의했다. 친일파의 은행예금을 동결하거나 재산을 몰수하고, 식량창고를 개방해 쌀과 물자를 배급하자는 것들이었고, 그것은 대다수 인민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기본적인 욕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흘째가 되던 날 22일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그날 오후 순천 서면 학구에서 일어나 전투에서 그의 심정적 동지들은 타격을 받고 지리산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혁명의 빛은 너무나 짧게 빛났고, 노을빛 피로 물들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아내의 직감은 맞아 떨어졌고, 어스름 새벽빛이 밝기 전 그는 집 뒤안 나뭇짐더미 속에 떠밀리듯 숨어들었고 그 날 오후에 협력자를 색출한다고 뛰어든 경찰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연대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는 것은 숨겨질 수 없었고 그의 부인이 대신 끌려갔다. 도처에서 총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는 소리와 어디 있냐고 윽박지름에 이어지는 아내 비명. 아이들이 울부짖고, 달려온 아이들 이모들이 공포에 떨며 애걸하는 소리에도 그는 그 도피처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아내가 끌려가고 이모들 손에 이끌려 나간 아이들 소리도 끊기고, 짧은 가을해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불안감과 초조함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계엄령 때문에 마을은 괴괴한 침묵에 휩싸여서 나뭇단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김유섭 역시 행여라도 그 공포스런 고요를 깰까봐 더욱더 몸을 굳혔지만 그의 귓가에는 온갖 소음이 넘쳐났다. 아내가 울부짖는 소리와 그녀 태중에 있는 아이 울음소리마저 환청으로 들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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