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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이름 - 7<기획연재 - 소설 여순10·19의 기억 2 >

* 여순사건의 피해자와 그 유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

송은정 작가 (문학박사)

여순10·19 관련 증언록과 책들을 펼쳐보면서 여러 감정들이 벅차올라 토해내고 싶은 것들이 입안에 가득 찼다. 눌변인 나로서는 말이 더 어눌해질 뿐 나 역시 그들처럼 말하기를 통한 증언이나 치유 같은 것이 불가능함을 실감했다. 신경외과 의사 펜필드의 실험을 바탕으로 그려낸 감각과 운동 호문 쿨루스라는 것이 있다.

뇌의 영역별 기능과 그 분포 정도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신체 각 기관의 근육 양이나 감각 세포 양의 조건에 따라 뇌가 담당하는 뉴런의 양이 다른 것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인간의 신체를 묘사한 뇌 난쟁이 그림이라고도 알려진 것이다.

이 호문 쿨루스는 혀와 입술을 포함한 입과 손발의 크기가 기형적으로 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간이 입을 통한 먹기와 말하기를 우선하며 그를 수행하기 위한 손발의 역할을 강화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더불어 이야기하기의 욕구가 그만큼 큰 것은 인류가 그 감각을 키워 인간다움의 한 면모를 이루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터이다.

그런데 그런 말하기를 금지당한 우리의 부모들은 어쩌면 그들이 아직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 더 열심히 손발을 움직여 노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눌한 내가 이렇게 입이 아닌 손으로 글을 쓰며 말하기의 욕구를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법과 폭력 앞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이들 특히 살아남은 빨갱이의 가족인 할머니나 아버지는 그 말하기의 금기를 수행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가슴 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이나 생각부터 억눌러야 했을 것이다. 생각과 감정에 따른 자율적인 판단을 할 수 없음에 따른 존재의 전락은 그저 수동적인 존재로 손발만을 움직이는 일꾼, 국민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길로 이어졌다. 국가의 부당한 폭력은 내 피붙이들 가슴에서 솟아나는 억울함이나 분노, 울분 같은 감정과 감각마저 제거하도록 했다.

몰락한 집안과 존재의 추락에 대해 느껴야 하는 수치심과 국민의 적으로 선언된 것에 대해 스스로를 혐오하며 갖게 된 죄의식만을 남겨두고서. 은총 속에 있는 인간이 아니라 국가의 법이라는 율법의 잣대로 규정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했다는 죄의식이 스스로의 의지나 자발성 없이도 강하게 내면화 되어버렸을 것이다.

국가의 명령이라는 기준과 불일치한다는 것을 자각한 고유한 존재로서의 한 인간은, 아니 빨갱이와 그의 가족들은 이미 틀어져버려 간극을 채우지 못한 채 부끄러울 수밖에 없어 고개 숙이고 살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70년이 넘도록 구차한 일상을 견뎌내며 그 간극을 채워보려 누구보다 더 입을 꾹 다물고 군말 없이 충성스러운 국민이 되어보려 했을 것이다. 술김에 이를 바득바득 갈거나 거석이나 머석이란 암호로 지나치듯 내뱉는 것만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유혹을 견뎌냈을 것이다.

마른 잎들이 바스락거리며 흩날리는 해질녘 와온 해변으로 차를 몬다. 양지쪽 누운데미라는 이곳을 겨울이면 찾곤 하는데 올해는 내게 여름이 끝나가기가 무섭게 한기가 가득해져 어느 해보다 빨리 이곳을 찾는다. 원하는 만큼 시원스럽게 내려주지 않는 비를 탓하던 여름과 다르게 하루하루 뭉텅뭉텅 잎들이 지더니 순간 차가운 공기가 압박해왔다.

이름이라도 따뜻한 이 바다를 찾았지만 따뜻한 바다는 추울 때 찾는 곳이었기에 와온은 이름과 다르게 늘 몸을 움츠리게 하는 추위로 각인될 수밖에 없는 곳이란 걸 새삼 되새긴다.

넘어가려는 마지막 빛나는 해를 반사하는 바다가 금빛으로 일렁인다. 드넓은 갯벌을 드러낸 채 저만치 물러나 있는 바닷물도, 젖은 채 속살을 드러낸 갯벌도 모두 함께 금빛이다. 저 먼 곳으로 멀어진 바다의 일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해변의 모래나 갯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아닌 거대한 바다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 깊은 속울음을 울고 있는 바다. 깊은 골짜기 솔바람 소리와 비슷하지만 더 깊고 애처로움 속울음소리가 그 서러움의 크기만큼 거리를 뛰어넘어 바로 곁에서 듣는 것 같다.

금빛이 사그라지면서 하늘의 색이 사라져가더니 수평선을 경계로 붉어지면서 보랏빛이 번져 어둠을 끌어들이고 있다. 갯벌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저 먼 선착장 가로등에 불빛이 켜지고 어느 사이엔가 내 곁 가로등 아래로 고양이 한 마리가 천천히 바다를 향한다. 반사할 물기마저 말라 금빛으로 빛나보지 못한 물 빠진지 오래된 갯벌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해안도로 끝에 선다.

내가 그치지 않는 먼 바다의 속울음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데 이 녀석은 가까운 갯벌의 점점의 구멍들을 응시하면서 오랫동안 꼼짝 않는다. 수평선 위로 가는 손톱달이 낮게 떠오르고 그 옆에 별 한 두 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그를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이제 혼자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부슬거리는 여름비 이전부터 그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내 마음의 치료를 위해 만났던 그는 내가 점차 심리학을 공부하고, 탈인식의 경계에 도달하기 위한 사유놀이에 빠지는 과정들에서 내 좋은 의사이자, 선생이자, 친구가 되어 주었다.

어느 사이 모든 것들을 해낼 때 나에게 그는 의지를 북돋워주며 즐거움을 찾게 하는 심리적인 의지처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그에게 그것은 문제적일 수밖에 없었다.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그의 태도가 직업 소명 때문인지 나에 대한 마음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갈 때 쯤 우리 관계는 내 우울증의 또 다른 이유가 되어 가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가 내 치유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 홀로 설 수 있게 연습을 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의식의 35%정도가 전인식에 머물고 있는 나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 채 공격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아가는 단계에서 허브농원을 만들며 생태적인 삶을 살 계획을 세우던 내 일상들이 흐트러져 가던 시기와 겹치면서 내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로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그의 행동들을 배신처럼 여기게 되었다. 메마르거나 태풍이 휘몰아치거나 했던 이 여름의 일이다.

그 여름 그가 기르던 허브를 한 움큼 끊어 작은 다발로 선물해 주었는데 난 그 허브 중 두 줄기를 집 앞 화단에 꽂아두었었고 그것들은 신통하게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허브가 뿌리를 내려가던 메마른 가을을 지나는 동안의 그 어느 시점부터 그와의 거리가 처음의 그만큼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할아버지를 둘러싼 역사의 비극들을 정리하고, 그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감정들과 내 전인식의 어린 자아를 글로 정리하며 그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그가 안도한 이후부터였는지 아니면 그의 지속적인 거리두기 연습에 지쳐 내 마음이 움츠러들 만큼 움츠러져버린 어느 지점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썰물 따라 가버린 물고기를 기억하느라 한 곳을 응시했는지 모를 고양이가 몸을 부르르 한 번 떨더니 서서히 몸을 돌린다. 뒤돌아서는 뒷모습에 달라붙은 미련과 회한의 무게만큼의 항력을 받고 있는지 아주 느리게 걸어간다. (7회)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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