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문학박사 송은정

* 여순사건의 피해자와 그 유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

아버지들은 턱없는 평가절하에 발끈하며 뭘 모르는 녀석들에게 푸른 바다만큼 가치 있는 갯가 바다의 힘을 설명해주었어야 한다. 당당하게 와온해변을 감싸는 여자만의 소중함을 알려주시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터전인 바다에 대한 불만을 듣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입을 꾹 다문다. 의례 그의 가벼운 체구만큼 마른 웃음을 흘리던 아버지 철관과 꺼지기 전 열기 없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같이 좌우로 몸을 흔들던 작은아버지 문관이 동시에 사그러질 듯 모든 동작을 멈춘다. 메밀묵을 짓이겨놓은 것 같은 물빛이 당신들의 태생과 삶의 궤적 역시 휘저어진 구정물처럼 부정하고 불순했기 때문이기라도 한 듯이. 오랜 동안 그런 단정들 앞에서 취해왔던 버릇 같은 마비였다.

하긴 나 역시 한소리 하려니 힘에 부친다. 매체들이 노출시킨 대부분의 정보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 창으로만 세상을 보며, 직접 가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않은 것들도 그러할 것으로 시뮬레이션 하며 사는 우리이다. 바다는 푸르고 노을은 붉고, 파도는 하얗게 일어야 한다고. 광활한 자연과 사람들 사이 관계맺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미처 알지 못하는 다양한 현상과 상황들, 거역할 수 없는 우연들마저 알고 있는 틀들에 억지로 맞추려 한다. 그 고유한 것의 원리 하나하나를 인정하기보다는 운용할 수 있는 질서 잡히고 분명한 세상을 위해 교정되어야 할 오류로 단정하거나 예외의 것으로 소외시키기도 한다.

“이 녀석들아, 이런 바다도 있다는 걸 아직 몰랐어? 너희들 황해 바다 알지? 그 황자가 무슨 황이니?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할 때 그 누런 색, 옐로우 씨야, 노란 바다. 그리고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갈랐다는 그 바다는 홍해지? 그건 붉을 홍, 붉은 바다 레드 씨야. 그뿐인 줄 알아? 검은 바다 흑해도 있어.”

“진짜? 진짜 빨간 바다, 검은 바다도 있어?”

“이 녀석들아, 그럼 그런 이름을 괜히 붙였겠냐?”

“에이, 그건 그냥 이름만 그렇게 붙인 거잖아.”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데. 의미들이 다 새겨져서 하나의 이름이 되는 거야.”

“사기 치지 말라요. 여기 봐요. 구글로 검색해 보면 금방 알 걸. 이렇게 다 파랗기만 하잖아.”

이제 겨우 9살이 될 녀석이 스마트폰 속 홍해바다의 푸른 이미지들을 코앞으로 불쑥 내민다.

“오우, 빠른데. 사실 나도 홍해바다가 빨간 것은 직접 보지는 못했어. 그렇지만 여기도 쓰여 있잖아. 봐봐. 바다 속 산호나 주변의 산맥 때문에 이름처럼 보일 때도 있다고 나오잖아. 야, 너 그리고 적조 몰라? 적조만 와도 바다는 붉어지기도 해 쨔샤. 홍해라니까 사과같이 빨간 바다만 떠올리나 본데 붉은 색도 아주 여러 가지잖아. 사진으로 표현되지 않는 색들도 있는 거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거라고.”

“암, 그렇지. 푸른 바다라고 허지만 날씨에 따라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것이 물색이여. 여그서 배를 타고 조금만 더 나가도 또 물색이 달라지고.”

9살 눈높이에 맞추려다 보니 그랬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아버지 피를 이어받아서였는지, 굳어지는 아버지들을 의식하느라 그랬는지 말이 한없이 가벼워진다. 덕분에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무심한 듯 나서서 한마디씩 거들어주신다.

“이 바다가 그다지도 맘에 차지 않느냐?”

“네, 외할아버지. 이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은 맨날 맨날 미세먼지가 낀 날 같아서 답답할 것 같아요.”

“허허허. 그래, 그렇게 느끼는 물고기들도 있겠구나. 그래도 여기 여자만에는 숭어도 살고 감성돔이랑 농어도 산단다.”

여자만(汝自灣). 낮게 누운 와온해안으로 바닷물이 넘어 들어오기도 한다 해서 넘자만이라 한 것을 이두식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가끔은 물보다 낮아지는 땅에 대해서 이 녀석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담이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붙여주었던 이름처럼 대상의 속성을 잘 드러내던 말들은 사라져가고 있다. 오히려 이름은 선입견으로 작동하거나 고정관념이나 낙인이 되어 대상을 얽어매기까지 한다. 황해나 홍해를 크레파스나 물감의 색으로만 떠올리게 하거나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적의 속성을 부여하고 소외시켜버렸던 것처럼. 바닷물과 뭍이 서로를 넘나드는 바다라는 넘자만은 자칫 경계를 침범하는 바다의 공격성이나 낮은 땅의 열등함을 부각시키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져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저기 개펄들에 송송송 나 있는 구멍들 보이지? 게가 살고, 망둥어도 살고, 낙지랑 조개들이 살고 있는 집들이야. 게들이 들락날락 하는 것 보여? 저 꼬물거리는 친구들 집을 감싸주고 청소해주느라 바닷물이 개펄 색인 거야.”

“그래도 바닷물이 맑고 파랗다면 더 좋겠어요. 그럼 게랑 조개도 더 좋아할 텐데.”

“녀석, 그건 억지지. 코코아 타 먹을 때 물이 어떻게 변해? 코코아가 녹아 코코아색이 되잖아. 물과 코코아가 만나 어우러지면서 색이 달라지는 것처럼 이 바다도 그런 거야. 이 바다가 개펄을 다 품어주느라 색깔이 그런 거라고. 너 그리고 푸른 바다도 컵으로 떠서 보면 그냥 아무 색 없는 물이란 거 알아, 몰라? 바다는 원래 푸른 것이 아니라 푸르게 보이는 것뿐이야.”

“그런가?”

“그럼. 그리고 너 생각해봐라. 바닷물 속에 붉은 색을 내는 작은 플랑크톤이 아주 많이 있는데, 바다가 ‘야, 너네 붉은 색 다 죽여! 난 항상 푸를 거야.’ 이러면서 혼자만 잘난 체한다면 얼마나 밥맛이겠냐? 바다가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하늘색도 담아주고, 주변에 산 빛도 비춰주면서 변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잖아.”

“멋진 일? 하긴 우리반 우영이도 무조건 자기만 맞고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다고 해. 제 말만 들으라고 하는데 정말 구제불능이야.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면서 무슨 말을 못하게 해. 더러워서 그냥 냅둬버려. 근데 기분 나빠.”

“기분 나쁜 녀석을 왜 그냥 둬? 아닌 것은 아니라고 똑바로 말해야지. 너 바다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알지? 여기 물 빠져서 보이는 갯벌이 더 넓을 것 같니? 바다가 더 넓을 것 같니? 바다가 아마 더 깊고 넓게 펼쳐져 있을 거야. 그런데 그런 바다를 이 개펄들이 색을 바꿔놓았잖아. 개펄도 정말 대단하지 않니? 아주 작은 알갱이들이 이 넓은 바다의 색을 바꿀 만큼 존재감을 지녔다는 거잖아.”

“존재감? 내 말도 들어줘 하는 거야?”

“그렇지! 너 그 우영이란 녀석에게 꼭 전해라. 바다가 성내며 큰 파도를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바다 속에 있던 모든 것들이 들고 일어나서 서로의 색을 드러내려고 안달하게 된다고.”

“응. 내가 이 초코라떼 바다를 찍어서 사진 보여주면서 말할 거야.”

“뭐 초코라떼 바다? 푸하하. 야, 그 정도냐? 하지만 이 바다도 멀리서 보면 종종 푸르게 보여. 바다는 하늘을 제일 많이 담고 있으니까. 하나만 알거나, 보이는 것만 전부라고 알면 너도 우영이처럼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뭐야? 뭐가 그렇게 복잡해. 그래도 내가 본 이 와온 바다는 초코라떼 바다야.”

“그래, 그럼 우리 와온 바다가 키운 맛있는 것들 먹고, 초코라떼도 먹으러 가자!”

모두가 바다가 푸르다고 할 때 혼자 나서서 초코라떼니, 숭늉 바다니 들먹거린다면 이 녀석도 앞으로의 삶이 참 고달파지겠다. 그래도 네가 말해주렴. 세상엔 이런 바다도 있다고. 바다란, 세상이란 서로 관계 맺으며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지, 오로지 하나만 맞다고, 모두 같아지라고 억지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 호에서 계속>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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