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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이름 - 6< '텅 빈 이름' 6회차 내용이 누락돼 있어 게재합니다>
송은정 작가

10살 어린 소녀가 눈앞에서 아버지 오른쪽 머리가 총에 맞아 날아가는 것을 목격하고, 12살 소년이 배꼽 옆에 구멍이 뻥 난 형의 시신과 마주하고, 7살 소녀가 마당에 부려진 피범벅이 된 아버지 시신과 마루 끝에 앉아 통곡하는 임신한 어머니를 바라봐야 했던 기억들은 말해질 수 없었다. 분노와 원망을 터트리며 울부짖던 사람들은 그 화를 못 이겨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뒤따랐기 때문이다. 뜨거운 화기에도 꼼짝 않고 불타는 집을 지키려 했던 가장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친척집 헛간 구석에서 냄새를 풍기며 썩어서 죽어갔고, 장남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던 늙은 아버지는 정월 초하루 세배 온 마을 젊은이들을 보고 죽은 자식이 떠올라 갱갱이 섯들어 기함을 하고 쓰러져 저 세상으로 갔고, 온갖 고문에 늘 욱신거리던 사지를 끌고 다니던 부인은 까만 교복을 입은 학생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던 경찰인 줄 알고 기절초풍해 도망치다 허망하게 죽기도 했다. 이야기될 수 없는 슬픔은 사라질 수 없다. 잊히지 않는 감정과 기억들은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 커다란 몽우리로 박혀서 곪고 곪아가며 몸과 마음을 좀먹어 간다. 소복을 입은 채 온 산과 마을을 헤매던 미쳐버린 할머니,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의 생사나 시신을 찾기 위해 남은 자식들을 내팽기고 무당들을 찾아다니던 어머니 혹은 백일을 물 한 두 모금으로만 버티며 삶을 포기한 채 눈물로 누워 지내던 과부는 그렇게 곪아가는 상처를 안고 서서히 밭아지고 몽우리가 곪아 터져 독기가 온몸으로 퍼져갈 때까지 서서히 죽어갔다. 그들이 한스럽게 웅얼거렸을 말들이란 한낱 광인의 것으로나 여겨지면서 여전히 이야기로 풀어지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남편이나 자식을 빨갱이로 둔 이들은 세상 그 누구보다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아비나 자식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해도 그들은 자신의 분신이자 전부였기 때문에 자신 역시 빨갱이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원망의 표적이었던 빨갱이가 사라짐으로 인해 시위는 남겨진 그들의 분신에게 향했는데 원망의 화살이 빗발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은 계속되었다. 혈육이나 친지들에게도 빨갱이 가족이라는 혐의로 매질이 쏟아지고 고문이 이어지면서 너도나도 얼병을 다스리기 위한 똥물을 우려내는 나날들이었다. 같은 집안, 이웃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하고 풍비박산을 맞이해야 했으니 그 억울함이 오죽할 것인가. 그러니 남겨진 이들은 그 화살들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입을 다물었다. 한 마을에서 살던 서로가 서로를 향해 비수를 꽂아야만 했던 이들은 공평하게 서로의 분신들을 잃었고, 그렇게 입을 다물고 형벌처럼 마주하며 살아내야 했다. 가장 소중한 이들을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린 죄를 지은 것 말고도 여전히 자신의 존재로 다른 누군가에게 해가 되고 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세상은 그들이 잃어버린 소중한 존재들을 혐오하고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마저 저주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입 밖에 낼 줄도 모르게 만들어 버렸다. 존재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맞서 소리 지르며 통곡하고 싶지만 그들을 위해 통곡할 자리, 호곡장(號哭場)은 마련되지 않았다.

불태워진 집 대신 묵을 방을 찾아 동네의 여덟 집을 전전하며 이사를 다녀야 했던 빨갱이의 어린 자식이 감내한 수치심과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던 친척들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내몰아 떠돌아야 했던 소년의 서러움, 예닐곱의 아이가 설사 그것이 사내아이였어도 할 수 있는 일이 그것이었기에 아이보개로 전전하고, 집을 떠나 멀고 먼 곳에서 남의집살이를 하며 견뎌야 했던 존재의 추락, 남자라고는 남아있지 않은 집에서 학교 문턱에도 못가보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나뭇단을 지고, 낫을 들어야 했던 소녀의 힘겨운 노동 같은 것들은 그저 개인의 서러운 운명에 불과한 것으로, 인생 푸념으로나 말해질 수 있을 뿐이었다.

기억에서 지워져야 했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잃은 가족이 가차없이 죽여도 되는 살인마나 악마와 같이 여겨지는 빨갱이였기 때문이다. 빨갱이라는 명명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며 어떤 저항도 묵살할 수 있을만한 절대적인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 힘은 참으로 오랜 동안 법과 규율, 그에 따라 허용된 폭력과 생활규범, 문화 같은 광범위하면서도 치밀한 방법으로 키워졌으며 국민을 집요하게 복종시켜 나갔다. 그것은 신체와 정신은 물론 마녀재판을 일삼던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영혼마저 장악했다.

국가가 새로 수립된 지 두 달여 만에 일어난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부정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계시가 되었다. 14연대의 봉기와 함께 시작된 폭압의 정치는 국가의 법을 새롭게 제정하는 합법화의 과정으로 정당화되었다. 법이 없이 10월 22일 내려졌던 계엄령은 그 해 11월 24일에야 법률 제69호로 제정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인을 억압하던 예비검속 제도가 부활했고, 독립 운동가를 탄압했던 치안유지법을 그 해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란 이름으로 법제화했다. 국가보안법은 최고형이 사형이었고, 결사나 집단의 조직과 가입뿐만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협의하거나 선전한 사람마저도 처벌할 수 있고, 행위가 없었더라도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국민을 처벌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1948년 12월 26일부터는 작은 부락이나 직장 말단 조직에서까지 ‘국민회’를 결성해 대한청년단이니 대한부인회니 하는 애국단체의 이름으로 국민의 반공 태세를 강화하도록 했다. 국민반은 10호 내지 20호 단위로 구성되어 최소 월 1회의 반상회를 개최하고 반공국민을 의식화 하는데 앞장섰다. 또 신생활운동이라는 명목 하에 온갖 궐기대회며, 수양담화회를 열고 동원과 선전을 통해 생활규범에서부터 의식까지 일상을 규율해가기 시작했다.

예비검속과 함께 유숙계라는 것이 실시되면서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49년 7월부터 실시된 유숙계는 하룻밤이라도 집 밖에서 잘 경우 24시간 이내로 경찰관서에 보고해야 하는 제도였다. 좌익 세력을 색출한다는 목적이었지만 국민 모두를 감시하며, 국민 모두가 감시자로 나서게 하는 제도였다.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생각과 몸을 구성해내는 엄청난 기획이 진행된 것이다. 반공주의는 텅 빈 이름이었고, 그래서 다른 모든 가치들마저 흡수해 자기화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 포식자가 되어 국가와 국민을 재편하는 기능을 수행해냈다.

금지의 법과 폭력 앞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이들 특히 살아남은 빨갱이의 가족인 할머니나 아버지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슴 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이나 생각, 그것에 따른 판단을 자율적으로 표현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은커녕 존재의 전락 앞에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감정과 감각마저 제거해버려야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의 부당한 폭력은 내 피붙이들 가슴에서 솟아나는 억울함이나 분노, 울분마저 내몰아 버렸다. 몰락한 집안과 존재의 추락에 대해 느껴야 하는 수치심과 국민의 적으로 선언된 것에 대해 스스로를 혐오하며 갖게 된 죄의식만을 남겨두고서. 은총 속에 있는 인간이 아니라 국가의 법이라는 율법의 잣대로 규정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했다는 죄의식. 그 죄의식은 스스로의 의지나 자발성 없이도 강하게 내면화 되어버린 국가의 명령이 기준이 되어 스스로 이탈자라는 죄의식을 안고 국민이 되어가게 했다. 고유한 존재로서의 한 인간과 국민으로서의 불일치를 메우려는 그 죄의식과 이미 틀어져버려 간극을 채우지 못한 채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빨갱이와 그의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70년이 넘도록 구차한 일상을 견뎌내며 그 간극을 채워보려 누구보다 더 입을 꾹 다물고 군말없이 충성스러운 국민이 되어보려 했을 것이다. 술김에 이를 바득바득 갈거나 거석이나 머석이란 암호로 지나치듯 내뱉는 것만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유혹을 견뎌냈을 것이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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