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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이름 - 14* 여순사건의 피해자와 그 유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
송은정 작가 / 문학박사

“대한민국 만세라고, 나부터 죽이라고……, 좋았겠구만!”

마을 입구 그 오래된 교회 앞에 버티고 선, 마치 양팔을 번쩍 들어 만세라도 부르듯 굵은 가지를 양 갈래로 뻗어 올린 200여년이 되었다는 추자나무. 그 나무 아래를 지나며 아버지가 웅얼거리신다. 거대한 검은 형체의 만세 앞에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흘러내린다.

아버지란, 어쩌면 철장 안에서 벼슬을 세우고 번들거리는 깃을 피로 물들이며 죽음과 맞서는 투계일 수 없었을지 모른다. 가열찬 소명과 당위들을 주장해 본 적도 없이, 그저 살아내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눈을 내리깔며 장외로 빙글빙글 겉돌기만 했을 것이다. 그 살아내옴의 방식이 아버지의 상처였을 지도…….

원죄 이후 아담들이 사는 방식은 비굴한 살아냄이란 형벌 수행의 다른 이름 같아 보인다. 계율과 금기를 세우며 신과 같아지려는 권력자가 아닌 대다수의 아담들은 이런 수형인인지도. 금하는 과일을 따먹었다는 사소한 파계에서 비롯된 삶의 처절함을 견뎌야 하는 형벌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생각의 이탈을 감행한 자의 자식들에게 확실하게 적용된다. 이미 탈주자에게는 목숨을 앗는 단죄가 이뤄졌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들은 죄를 감행하는 주체적인 존재였던 적도 없이 유폐됐다.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이 그러했듯 협상이나 항변은 생각도 못하고, 단번에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쭈그러들어 오래된 형벌을 유산으로 남김과 동시에 자유를 봉인시켜버린 셈이다. 나의 아버지는 그 상속자로 죄값을 치르듯 살아나온 것이다.

할아버지가 나뭇단 속에 숨어서 수없이 읊조리던 살아남으라는 기도는 그 아들들에게 벌을 승계하는 일이 되어버린 셈이다. 마지막까지 무릎을 꿇고 몽둥이를 감당한 이유이기도 했을 남은 가족들에게 살아남으라는 은밀하고 간절했을 지령. 그저 살아남기만을 바랐던 절박함이 선한, 아니 순종적인 연약한 아담들의 착오였을지 모른다. 아버지들에게는 이유도 모른 채 형벌만을 감당하게 하게 했던.

신이 살려준 이유가 다 있다는 아흔 살 노인의 멀리 보내는 목소리는 그저 그런 아담의 형벌을 확인시키자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무력함을 자각하고 깨어나라는 계시일까?

아버지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고 나란히 걷는다.

입안에서 몇 마디 말들이 계속 맴돌다 삼켜진다. 무언가도 함께 흘러 들어간다.

아버지.

뒤척이던 아버지가 잠이 드나 싶은 순간 울먹이며 경기(驚氣)를 하듯 숨을 들이켜다 낮은 탄식 같은 비명을 한차례 내뱉고는 한참을 운 아이처럼 뒷울음을 삼키신다. 얕은 잠 속에서 제어되지 않은 서러움이 도둑같이 찾아들었다 사라진 모양이다. 손을 꼬오옥 잡아드린다.

투계가 아닌 날아오르는 새를 떠올린다. 푸른 바다를 박차 오르며 하늘 가득 채운 구름을 자신의 몸체로 하는 새. 흰 눈이 쌓인 웅장한 산의 능선 날개를 펼친, 산의 형상 그대로가 새인 새.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오브제로 종종 등장시키는 새는 날개를 활짝 펴고 화폭을 가득 채운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그린 자화상에서도 자신 앞의 화폭에 양 날갯죽지를 45도씩 펼쳐 올린 새를 그리는 중이다.

그런데 바다 위 구름 새를 그린 그림의 제목은 the large family, 대가족이다. 새 한 마리를 그려놓고 대가족이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을 붙인 내력을 알 수 없었고,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이 밤 그 그림들이 하나로 이어지며 이해되기 시작한다. 새와 함께 등장하는 알을 떠올리면서이다. 눈 쌓인 산이자 새이기도 한 그 새는 화폭 전면에 배치된 창틀에 놓인 두 개의 알을 정확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자화상에서 새를 그리고 있는 화가가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알이다. 알을 바라보며 새를 옮겨 그리고 있다. 이 새 그림을 그리는 자화상은 르네 마그리트가 다시 직접 그 그림 앞에 앉아 그림 그리는 자세를 취하면서 이중의 자화상으로 이어진다. 화가와 화폭 속 자신과 그려지는 새는 곧 알을 옮겨 그린 결과물이다. 그 화가는 자신이 가진 알을 보며 곧 자신을, 날개를 활짝 편 새를 꿈꾼 것이다. 그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알을 낳고, 그 알은 곧 다시 새이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자식을 낳은 부모는 그 자식이 자유로운 새로 날아올라 자신을 완성시키기를 바랄 것이다. 새장 속에 쳐 박혀 갇힌 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펼치며 광활한 바다와 하늘과 산과 하나 되는 대가족이 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영토와 가족은 자유의 땅에 속해야 했다. 그 비굴의 살아냄은 스스로 알이 되어 갇혔다 새를 부화시켜 날려 보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상처는 이중의 자화상처럼 또 다시 그 그림 속에나 갇혀버리는 아들을 견뎌내면서 더 곪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를 떠올린다. 그의 통찰은 무엇이었는지…… 나에게 그는 내가 해석한 대로 읽혀지는 존재로 저만큼 있을 뿐이다. 제멋대로인 내 오독은 우습게도 그가 아버지 같이 느껴진다는 터무니없음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언젠가 그에게도 그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엣헴거리며 의젓한 아버지 시늉을 내주던 그였다. 지금 그 역시 그의 영토를 가꾸기 위해, 그가 좋아하던 그림처럼 한껏 날개를 펴 올리며 힘겹게 날개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아버지들을 가둔 새장을 열어야 한다.

밤새 뒤척이다 이른 아침 뒷산을 오른다. 평소보다 더 먼 둘레길로 돌아가며 볼을 스치는 투명한 겨울 공기에 불면의 각성을 이어간다. 간밤 흩뿌려진 눈이 얇게 내려앉은 땅은 얼음의 막으로 덮여 발걸음에 맞춰 공허한 소리를 낸다. 부슬한 땅에 스며있던 눈물들은 얼어 부풀어 올라 그리움의 기둥들을 세웠다. 다롱디우셔 마득사리 마득너즈세 너우지, 다롱디우셔 마득사리 마득너즈세 너우지…… 고려가요 이상곡(履霜曲)에 서리 밟는 소리를 되뇌며 부질없이 자라는 그리움 소용없다 가만가만 눌러 다독이며 걷는다.

헉,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온통 흰 띠를 두르고 도열해 있다. 산은 점령당했다. 1948년 여수와 순천, 1980년 광주에서처럼 같은 나라 사람, 같은 편을 공격할 때 국가의 명령을 수행 중이라는 완고한 의미로 흰 띠를 두르던 군인들처럼 나무들이 무장하고 있다. 그것은 반대편 산 아래쪽부터 진군하듯 올라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곧게 뻗어 지름이 한 아름은 되는 편백나무들이나 듬성듬성 끼어 자란 상수리는 물론 한 손아귀에 잡히는 가는 소나무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1m50cm 정도의 높이들에 어김없이 2,3cm 폭의 가는 끈이 둘러져 있다. 자연은 그 흰 줄 하나로 가장 위화감을 주는 인공물로 변해버렸다. 성상이 훼손된 것을 목격이라도 한 듯, 누군가의 비열한 비밀과 마주친 것처럼, 추격자의 눈빛에 발각된 양 도저히 눈을 똑바로 들어 쳐다볼 수가 없다. 그 불경스러움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둘러 등을 돌려 버린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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