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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이름 - 16 (마지막 회)<기획연재 - 소설 여순10·19의 기억 2 >

* 여순사건의 피해자와 그 유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

작가 / 문학박사 송은정

첫눈이 없이 한 해가 지나갔다.

1월이 되어서야 하늘에서 내리는 것들은 슬프다. 너무 춥거나 충분히 춥지 않다는 뜻이니 두렵거나 원망스러워진다. 새해 들어 지난 해 그 때처럼 추적거리며 비가 내린다. 매섭지도 않아 서로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지내게 내버려둔 채. 그 멀어진 거리 사이로 겨울비가 슬픈 노래로 시난고난 앓게 한다.

내 마음의 새장에서 꺼내놓은 그는, 그라는 알은 부화되어 날개를 펼치며, 산이 되고, 하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또 다른 알을 통해 대가족을 이뤄갈 것이다.

그것이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알고 있었다.

내 가슴이 낳은 알은 그 그림 속 알이 영락없이 맨질한 조약돌처럼 보였던 것처럼, 애초부터 부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난 괜찮다고 애써 고개를 주억거린다.

대가족을 이루며 영원한 것도 있고, 화석 알로 남는 영원성도 있는 것이다. 멸종의 시간마저 건너뛰는 화석 알. 암흑의 매립에 깊숙이 몸을 맡긴 채 극단의 압력과 열을 견뎌내기. 시간과 생명을 지워내기. 그래도 온전히 그 형태를 간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불멸이 되지 않을까? 지워낸 시간이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이 오래 지난 후 화석 알은 그 영원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불멸의 비생명체는 전설이나 신화의 소재로나 회자되다 여전히 혐오나 수치, 혹은 공포나 두려움의 표상으로만 읽히게 될지 모르겠다. 내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렇게 읽힐까봐 끔찍했던 것처럼. 그 오랜 뒤에도 여전히 그럴지도……. 그래도, 그래도 내 가슴이 만들어낸 마음 유전자의 최소 정보는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러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막강한 당위들에 고개 들지 못했던 작은 진실들을.

그것이면 됐다.

스러지는 마모의 생을 미련 없이 파묻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희생과 부패, 다시 생명으로 이어지는 숭고한 순환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살아남음의 방식이 될 것이다. 내게는.

그러니 이젠 안녕.

내가 스스로를 묻어 굳어갈 때 아버지는 마치 발굴해 낸 화석의 유전정보를 읽어내려는 듯 당신이 묻어두었던 지난 시간들을 헤집고 계셨다. 예상치 못했던 기운차림이었다.

아버지는 1948년 10월 그 날에 14연대 군인들의 말을 잘 들어보자고 한 마디 해서 내란죄와 포고령 위반죄로 죽임을 당했던 이는 무고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4연대 군인에게 밥 한 끼 대접한 것 때문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당신 아버지 역시 그렇다고 항변하는 것 같이. 당신 아버지만큼 젊었고, 무고했던, 젊은 철도원 가장이 무죄였다는 판결을 받은 것은 71년이 지난 뒤가 되었다. 그 때의 구형과 형 집행이 부당했다며 다시 재판을 해달라고 요청한지도 8년이 지난 뒤에야 성사된 재심재판에서였고, 이미 함께 재심 재판을 요청했던 두 어르신은 타계하고 난 뒤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당신 아버지는 그런 재판 기록마저 없다고 한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또 하루는 베개로나 쓸 만한 두께의 최종보고서라고 쓰인 책자를 한 권 들고 오셨다. 표지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시다 나를 끌어 당겨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가리키신다. 순천시에서 유족 증언 채록 용역을 실시한 후 내놓은 보고서인데 손가락 끝에는 작은 글씨로 ‘여순 10·19항쟁’ 이라고 쓰여 있다. 아버지는 책자 안에 들어있는 바로 몇 집 건너 사는 이웃의 얼굴들보다 그 글씨를 더 놀라워한다.

아버지는 봄을 기다리신다.

며칠 만에 뒷산을 오른다.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아 휘적거려진다.

점령지는 산허리를 넘어가고 있었다.

편백나무 숲은 반질하게 다져진 길들이 침투하면서 길 옆 나무들이 듬성듬성 뿌리를 드러내놓는 치욕을 견디고 있다. 거기에 보잘 것 없는 또 다른 인위로 능욕당하고 있다. 나무에 둘러쳐진 흰 띠는 여전히 불가촉의 불경스러움을 자아내고 있었지만, 며칠만의 거리를 둘 수 있게 되면서 나는 가만히 그 나무들 허리께에 둘러진 것을 만져본다. 민질한 이물감은 경박하기 짝이 없는 비닐 끈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온 산에 쭉쭉 뻗어 자란 나무들을 질끈 묶어버릴 수 있는 장악력을 지녀 몸서리를 치게 한다. 진격의 최전선, 저만치 수풀이 두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린다. 그 소리 뒤로 흰 띠의 군사들이 불쑥불쑥 일어서고 있다. 잘 조성된 편백나무 숲 위쪽은 진달래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어 길을 내는 것은 어려울 텐데……. 그러나 그 소리들은 봄이면 분홍의 사랑스런 점점들로 산을 물들일 가지들을 우악스럽게 헤쳐 가며 군데군데 곧게 자란 나무들을 충성스런 수하로 삼아가고 있다.

임목 등기.

사유지인 그 숲은 곧 시에서 공원지역으로 조성할 계획이었다. 산 임자는 한 푼이라도 더 보상받기 위해 산림 전수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란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세어 수종과 크기까지 다 기록해 등록하는 일. 기록된 나무들은 표시를 하느라 흰 띠를 둘러두었단다. 굳이 그렇게 서류로 수량화하지 않아도 보상금은 나갈 터이지만 산 임자 마음이니 시는 별 상관을 하지 않는단다.

“그 흰 띠는 제거하도록 할 것입니까?”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네요. 일부러 그러기가 쉽겠습니까?”

무심한 말에 답답증과 함께 현기증이 인다.

다북쑥 싹이 올라오고, 진달래가 앙상한 가지에 불가지를 들어올리고, 수풀 여기저기서 갓 부화된 새들이 부스럭거리고, 먼 허공에 아지랑이가 일렁여도 산은 상중(喪中)이 될 것이다. 우뚝 성장한 아들들 같은 저 나무들이 상장(喪章)을 거두지 못하고 산 여기저기 도열해 있을 테니.

반란이 사건이 되고, 어느 사이 항쟁이 되었으나 해방은 오지 못할 것 같다.

또 다른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니.

아마 손가락 총이 아닌 계산기를 들이민 저 흰 띠의 진압군은 그 숲의 봄을 죽일 것이다.

나는 때를 기다리기로 한다.

봄이 되어도 물러가지 않는다면 내가 무기를 챙겨들고 산을 오르면 된다.

생각보다 그 끈을 잘라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단절하기로 마음먹기만 한다면.

(끝 - 지금까지 소설 <텅 빈 이름>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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