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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맛있는 복숭아 속살 속 벌레를 물어내는 새문학칼럼 40 -남길순, 시집 <분홍의 시작>, 파란, 2018.
송은정 작가(문학박사)

프로필

 

나로부터 달아나는 얼굴, 얼굴들

죽어서 다시 사는 오월의 휘파람이 된다

 

저 별과

환히 웃는 사람 중에

오늘 태어난 나는 누구일까

 

사진마다 목 없는 영혼

 

독백과 방백 사이

 

나도 모르게 들어온 작은 새

꽃 그림자도 숨었는데

 

내 얼굴 가면을

차례로 벗어 보지만 포개지는 입술이 없다

 

다가갈수록 흩어지는 새들

원본을 지우고

나를 날려 보낸다

 

천의 얼굴, 만 개의 웃음

 

반대편에 서서 이곳을 바라보던 사진가는

파일 이름을 밀화부리라고 보내왔다

 

 

밀화부리 파일 속에서 목 없는 영혼 같은 가면을 벗고, 독백과 방백으로 원본을 지우며 흩어지는 것들에 수없이 다가가려는 날개짓을 하는 시인 남길순.

그녀는 새이다. 그녀의 시는 새이다. 늙은 새가 낳은 알이었다. 새벽부터 순한 말을 몰고 와 잔등을 쓸며 기다리는 할머니 곁에서 부화해, 이제는 오줌보가 곧 터질 것처럼 푸른 허공에서 버캐를 문 말을 떼로 날려 올리는 새.(<말날>)

시인 남길순은 복숭아꽃 분홍으로 물든 순천 월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지냈다고 한다. 복숭아향 묻어난 덧니를 내비친 웃음을 터트리며 첫사랑도 하고. 복숭아 속살에 번진 1그램의 수치나 1그램의 당위로 물든 분홍을 시로 풀어낸 시작(詩作), 그녀의 첫 시집 <분홍의 시작>. 그녀는 이 시집으로 연분홍 꽃들을 솎아 쏟아 버린 무릉도원에서 가장 맛있는 복숭아 속에서 자란 벌레들을 노리는 새,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 온 뱀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가 되었다.(<시인의 말>, <분홍의 시작>)

아니, 그녀는 새가 오기 전, 새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전부터 그녀 안에서 울고 있던 것들을 수정시키려 했나 보다. 그녀 이전의 태곳적 이미 와온 갯벌의 사라진 구멍마다 별이 뜰 때 죽음의 노래를 들려주던 하늘과 수억 년 전 마그마 속에서 날아오르던 소쩍새와 뻐꾹새를 감지하면서. 서라벌 대릉원에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알들과 피라미드 속에서 자신을 투사하며 영원을 꿈꾸던 어떤 새의 흔적을 찾아내려는 시작. (<와온>, <서라벌의 아침>, <소피와 루체의 대화>)

누군가의 배 속에서 이미 난생이었다는 시인 남길순. 시인이 시작의 껍질을 쪼는 순간들이 만든 조각들을 시 속에서 줍는다.

그녀의 시작은 조개 같았을지도 모른다. 조개 안의 새. 세상 밖에서나 울었음 직한 부리로 눈알도 깃털도 없이 날려 보내진 분홍빛 고운 소리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날개 없는 바다에서 벌레를 쪼아댔을 것이다. (<푸른 곡옥 귀걸이>, <새조개>)

그러다 창가에서 싹을 틔우는 고구마 곁에서 음악 없이 밤새 춤을 추는 부리만 자란 새이기도 했다가, 지구 밖의 햇빛을 물고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무처럼 창을 넘고 싶어 더 버리며 얻으려던 새를 갈망했을 것이다. (<고구마와 새>)

어쩌면 나와 같이 일상을 내달았을지 모른다. 달리기새처럼. 아침마다 직선보다 둥근 선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달리기새로 날아오르지 못했던 시간. 이제 곧 죽을 먹이를 차지하려고 도로를 덮은 까마귀이자, 기린을 떠난 할미새처럼 견뎌낸 외로운 시간. 층층마다 물고기가 드나드는 물속, 호수 도서관에서 에페소의 파피루스를 해독해보다 줄지어 행간 밖으로 사라지는 겨울새가 눈 속에 슬어둔 알로 되풀이되는 새의 시간들. 그 일상들에 시인은 두통을 앓았던 것일까? 아니 그는 시인이다. 시간 속에서 가라앉는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닌 시인이다. 시인의 두통의 이유는 시의 행간을 만드는 것 때문일 테다. 시 속을 가르는 빈 길을 내는 날개짓 때문이었을 것이다. (<달리기 새>, <호수 도서관>)

그 시간과 두통 속에서 노을이 타오르는 뻘밭 저쪽에서 새는 밤새 상여 놀이하며 울부짖고, 대나무 타닥타닥 튀기며 달집 탈 때 참새가 되어 홀로 울고 있는 징 소리 옆에서 꽹과리 소리가 되었겠지. 어떤 날은 그네를 타고 몸마다 싹이 돋아나서 묶인 개가 잠에서 깨어나 쫓는 공중의 새이기도 했을 것이다. 돌이었던 형상과 결을 벗어버리고 이름을 얻어가던, 솜털 같은 날개가 돋는 돌새도 되고. 그러나 여전히 검은독수리가 노리는 먹이일 수밖에 없는. (<달집 태우기>, <그네가 있는 집>, <돌을 기르는 사내>)

새를 기르는 일은 딜레마에 빠지는 일이다. 헐떡이는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여린 존재를 손안에 두는 것은 보호가 아니라 해치는 일이 될 수 있으니까. 날개 가진 것에게 다가가기도 힘들고, 그것을 붙잡거나 곁에 두는 것은 폭력이 되기도 하니까. 새는 울거나 노래하거나 똑같이 두리번대며 착각하게 하니까.

그러니 시인은 그 안에 새를 매번 죽인다. 백일홍이 핀 연못가 담장 위에서 깃을 단장하며 낭창한 관과 젖은 날개를 지닌 수탉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울지만 자기 목소리를 모르는 목 떨어지는 소리로 파랗게 우는 수탉을. 그러나 그녀는 기어이 총을 사서 겨눌 대상을 찾아 옥상으로 오르는 매복자이다. 그리고 그 매복자인 그녀는 동시에 죽어있는 계단과 함께 발견되는 어린 새이기도 하며 자신이 허공에 쏜 총에 떨어져 버린 심장 속 숨어 있던 비둘기이기도 하다. (<매복자>)

그녀는 아직 기다린다. 매번 혀 속 칼을 벼르며 매복해서 심장 속 새를 노린다. 그것이 늙은 칼갈이 영감의 짓 같거나 허공에 쏘아지는 총알 같은 것이라 해도. 가벼워지고 허기진 예민함으로 기다린다. 새를. 시를.

시집에 실린 문학평론가 이경수의 해설처럼 “탈주와 몽상을 꿈꾸지만 결국 제자리를 빙빙 도는 행위에서 그다지 멀어지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해도. 기린과 느림보 거북이와 여우도 갈 수 있는 길을 아주 천천히, 천천히 발자국에 발자국을 겹치고, 지우며 되풀이한다. 너무 천천히 와서 다가온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시와 새가. 아주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니까.

 

기다리는 사람

 

그는 예언처럼 들려주었다

 

드넓은 평원에서

눈을 감고 똑바로 걸어 나아가면

지름 20m의 원을 그리며 돌고 있을 거라고

 

지도를 펴면

방금 누군가 이 길을 지나간 흔적

막다른 벽에는

손톱으로 긁힌 자국 같은 별이 떠 있고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스스로를 빙빙 돌고 있다는 기시감이 몰려오는 밤

 

지름길에서 만난 기린은 갈 수 있다

느림보 거북이도 갈 수 있다

여우도 갈 수 있다 중얼거리며 울고 있는

낯선 여자를 만났다

 

발자국에 발자국을 겹치며

발자국을 발자국으로 지우며

 

기다리다 지친 그가

이쪽으로 걸어온다

 

그는 너무 천천히 와서 오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점점 멀어졌으나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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