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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아닌 모든 것도 그것일 수밖에 없는……문학 칼럼 45. 이장욱,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제38회 이상 문학상 작품집, 2014.
송은적 작가(문학박사)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합니까? (261쪽)

기린이 아닌 무엇을 떠올리시나요? 기린 말고, 기린 아닌 다른 무엇이 생각났을까요. 작가 이장욱은 당신이 어떤 기린을 떠올렸을 거라네요. 당연하게 기린에 대한 모든 것을 생각했을 거라고. 마치 말 자체가 ‘이제부터 기린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였다는 듯이.

말이라는 건 그럴 수도 있나 봅니다. 말해진 그대로 전달되어야 하지만, 의도를 가지고 말하거나 듣는다면, 말해진 것은 그것과 정반대를 떠올리게 하는 힘까지 있는 것이지요.

소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처럼 자신의 말을 듣고 상대가 떠올리는 것이 곧 자기 운명이 되었다고 하네요.

나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보지 못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을 뿐이라고요. 아버지는 짧은 침묵 후에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습니다.

그게 그거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그거라니요. 어떻게 그게 그것이라는 말입니까? 그게 그것이라면, 대체 우리는 왜 말 같은 것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부반장의 지갑을 훔친 건 내가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담임은 내 뺨을 때렸습니다. 나는 지갑을 훔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도 담임은 내가 지갑을 훔친 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나의 운명입니다. 나는 그 운명을 따라 파출소로 갔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담임선생님이 내 짝을 만지고 더듬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뿐입니다. (267~268쪽)

소년이었던 ‘나’는 거짓말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은 따귀를 맞았고, 담임선생은 파면되지요. 말해진 것들이 정확하게 반대의 결과로 말을 배신합니다. ‘나’는 진실만을 말하거나 그렇다고 느낀다고 항변합니다. 혹 거짓을 말했다 해도, 그건 진심을 다한, 전력을 다한 거짓말이었다고. 그래서 결국 그것들은 운명처럼 사실이 되었다니 말 혹은 그것에 실린 마음은 힘이 대단한가 봅니다. 다만 ‘나’의 운명이 된다는 ‘나’의 말로 상대가 떠올리는 것들, 그것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권리가 없지요. 순수하게 상대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이니까요. 그럼에도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 된다면, 운명이란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이 소설에는 고독한 남자가 나와요. 고독하지 않은 인간이 얼마나 있을까만은 그 남자는 고독하지 않은 척할 수도 없었고, 숨기려 하지도 않았지요. 사랑하는 이를 보냈으니까요. 머지않아 사라질 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내놓으며 선택한 사랑을. 소년의 아버지인 그 남자의 내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지만, 낯설지도 않더라구요. 유명 사찰의 전도유망한 승려였는데 한 여자를 만나 환속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조금은 상투적인. 그 여자는 아이를 낳은 뒤 사라졌는데, 원래 약한 몸에, 폐가 많이 망가져 절을 찾았던 것이니까요. 산수유처럼 주변을 신선하게 할 수 있었던 화사한 여자. 아버지가 해탈이나 우주에 대한 깨달음, 자신이라는 지옥에서 자유로워지는 일보다 더 사랑할 수밖에 없던 사람. 그런 사랑을 잃었지요. 그러니 육체노동을 반복하고 한숨을 숨겨주는 담배를 피우며 사랑한 그녀처럼 폐가 망가지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무엇도 그를 외로움에서 건져줄 수 없었지요. 아들조차도.

그 아들 ‘나’도 고독하게 사랑합니다. 기린을. 그 첫 만남에 대한 느낌입니다.

나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어요. 어지러움 같은 것이, 어떤 의식의 혼란 같은 것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체온이 올라갔습니다.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전적으로 타는 듯한 시선 때문이었어요. 나는 그 뜨거운 시선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279쪽)

아버지만큼 강렬한 사랑에 빠진 것이 분명해 보이지요?

문제는 그 대상. 그것은…… 불상이었어요. 독특하고 아름다운 불상, 비로자나불이 결가부좌로 올라타고 있는 기린, 기린불이라는 별명을 가진 불상이었답니다. 물론 부처 아래 기린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사바나의 목이 긴 기린이 아니란 건 눈치채셨지요? 뿔이 하나 달린, 온몸이 오색찬란한 비늘로 덮이고, 화사한 빛깔 털을 흩날리는 동양의 상서로운 상상 속 동물인 기린 말입니다. 병으로 취급당하는 사랑병 스탕달 신드롬이지요. 사랑을 사랑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랑해선 안 되는 것과 사랑에 빠진 것이죠.

자신이 다니던 대학 박물관에서 만난 이 기린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은, 졸업 후 박물관 수위가 되며 십 년을 이어갑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다른 취미도 없이 자신의 아버지처럼 단조로운 일상을 유지하며.

그러다 기린불은 기린불로서의 진위를 의심받고, 진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치욕스러운 검증을 앞두게 됩니다. ‘나’는 기린의 타는 듯한 눈빛의 진실은 부정될 수 없다고, 진실이란 그렇게 연약한 것이 아니라며 기린과 이야기 나눕니다. 네, 말을 듣고, 말을 들어주고 그랬다네요. 그리고 그는 어떤 일을 결행해 버리지요. 이미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인생이 아니다.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때문에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겠지요.

가을날, 남자의 고독을 소설 속에서 엿봅니다.

작가 이장욱 (1968년 서울 출생, 2005년 장편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문학수첩작가상 수상.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수상.)의 소설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여행하기’보다 ‘그곳에서 살아보기’를 하는 일본인 여행가 하루오의 빙긋 웃는 모습을 오래 기억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만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구요. 현실을 살아내며 환상을 붙잡고 사는 쓸쓸한 인간들의 단면이지요.

우리는 ‘환상이 아닌 현실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환상에 사로잡히기 일쑤이지요. 말하고 있는 현실의 모든 것이 환상이구나 싶어지기도 합니다. 사실이나 진심의 말이든, 기도 혹은 거짓말이든 말이 나를 떠나서 무언가를 발생시키고, 다시 돌아와 내 운명이 되는 것처럼 그것이 그것이지요. 자신에게는 권리가 전혀 없는 누군가의 환상을 운명 삼아 살아가니 좀 쓸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이지요.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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