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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야 할 질문과 안아야 할 상처 1여순사건 구례지역 구술채록 조사 용역의 성과와 과제 (총 2회 중 1회)

구례군·순천대 여순연구소, 4월 20일 ~ 10월 16일,

구례지역 여순 유족 60여 명 구술채록

송은정 작가(문학박사)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는 구례군의 사업 용역을 통해 지난 2020년 4월 20일부터 구례지역 여순10·19 구술채록을 실시했다. 10월 제출된 최종보고서에는 구례읍과 간전, 토지, 산동 등 8개 읍면동 여순사건 유족 60여 명의 증언이 실렸다.

구례는 빨치산의 근거지인 지리산과 계족산, 백운산과 연결되면서 1948년 10월뿐 아니라 지리산 금족령이 해제된 1955년 4월까지 진압군의 빨치산 토벌 작전 등으로 지속적인 희생과 피해가 발생했다.

지난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피해 신청자를 대상으로 한 차례 피해 조사를 한 바 있다. 이 조사 보고에서 여순사건0·19와 관련해 1948년 사건 당시부터 1년여 동안 군경에 의한 구례지역 민간인 희생자 수는 약 800명 정도로 추산됐으며 확인한 희생자는 165명이었다. 진화위는 결정문을 통해 가해 주체를 국군 제3연대와 12연대, 그리고 구례 경찰로 확인했고, 지휘 명령계통을 살폈을 때 최종적인 감독책임은 국방부와 대통령 이승만과 국가에 있다고 밝혔다. 군경당국이 관련자를 체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무차별 연행, 불법적인 취조와 고문, 자의적인 심사와 분류에 따라 살해했고, 그것은 곧 국가가 국민에게 자행한 것이었다. 진화위는 군경이 행한 즉결 처분 등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계엄령의 일반적 한계를 벗어난 위법적인 행위였으며 민간인을 즉결처분하는 것은 사실상 학살이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결정문 말미에서 국가가 여순10·19와 관련해 과거 국가 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위령 사업 지원조치를 마련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이번 구술채록을 통해 이 결정 권고문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피해자와 유족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음을 확인했다. 구례지역 유족들의 가슴에는 국가의 사과 이행이나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음으로 인한 회한이 응어리져 있었다. 더불어 진화위 조사 이후 10여 년이 지나는 사이 피해자와 증언자들이 고령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기억하는 이는 현격히 줄었고, 오랜 세월에 그나마의 기억들도 희미해져 증언이 구체화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번 구술채록은 그동안 말하지 못하고, 숨겨온 이들이 이야기할 장이 마련되고,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이 글에서는 이번 구술채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들을 정리하고, 새겨봐야 할 주요한 것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울면서도 다 못할 이야기 꺼내놓고서, 웃음으로 바라봐 준 고마운 구례 사람들>

“몰라, 몰라. 아무것도 몰라. 다 잊어버렸어.”

아흔 살의 한 여성 구술자는 “한동네에 하룻저녁 제사가 일곱이라.”라는 말 이후 구체적인 질문들에 연신 고개를 저으며 이처럼 말한다. 당시 18살이었다지만 잊히고도 남을 만한 세월을 살아냈으니 모른다는 답변이 솔직한 것일 터이다.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이번 유족 구술채록 최종보고서에 실린 60명의 구술자 연령대를 살펴보면 70대와 80대가 53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90대 초반이 세 명에 불과했다. 즉 72년 전의 사건을 구술한 이들은 당시에 10살 이전 6, 7살이 가장 많았고, 15, 6세 이전 나이인 이들이 대부분인 셈이다. 지나버린 세월이 길다는 것뿐 아니라 겪어낸 시기가 사건을 충분히 인지하기 어려운 나이이기도 했다. 당시에 대한 증언은 직접적인 경험보다 오래전 가족과 마을 어른들에게 전해 들은 것이 주가 될 수밖에 없고 그나마 희미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구체적인 것은 답할 수 없어진다.

둘째, 죽음의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밥 먹다 불려 나가, 짐 지고 따라갔다가, 젊은 사람이라고 잡혀가 소식이 끊겨버렸으니, 왜 잡혀가고, 왜 죽었는지는 제대로 모른다. 당대에 이유 있는 저항을 하고 죽음과 맞바꾼 항거를 했다 해도, 그 내막을 헤아리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그저 아는 것은 갑자기 끌려가 싸늘한 시신으로, 혹은 떠도는 소문으로나 사라졌다는 사실뿐이다.

셋째,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몰라야 했던 것일 수 있다. 앞서 말한 아흔 살 구술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죽음을 둘러싼 직접적이고 예민한 질문에는 다시 아무것도 모른다고 거세게 도리질을 친다. 모르는 것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많지 않다.

선명한 것은 가슴에 남은 감정뿐이다.

10살 소녀가 얼굴에 총을 맞는 아버지를 홀로 목격하고, 어둠을 틈타 겨우 수습해온 피투성이에 퉁퉁 부은 훼손된 시신을 마주해야 했던 끔찍스러운 공포. 죽으러 가는 아들인 줄 알면서도, 자식이 어느 산자락 밑, 강가 모래톱 어디쯤 싸늘하게 쓰러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내 새끼’ 한번 소리 내 불러보지 못하고, 아는 체하지 못하고, 찾으러 가보지도 못한 부모의 심정. 그 지옥불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의 화인들만이 뚜렷하다. 낙인된 고통은 그를 발생시켰던 구체적 공간과 인과관계 등을 모두 증발시켜버렸다. 그것은 육하원칙 아래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구술될 수 없다. 그로테스크한 부조리 잔혹극처럼 이미지의 조각으로나 가슴에 박혀있을 뿐이다.

섬진강 간문교에서 바라본 지리산, 저 산자락 아래 잊혀가는 진실들

이번 구술채록에서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말이 있다. 우리는 그 단어를 최대한 은폐하고 제거해야만 했다.

그 말은 70여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전히 뇌리에 깊게 뿌리내린 말이자 금기였다. 구술자들은 그 금기를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혹은 그 금기의 대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기어를 산포(散布)시켰는지 모른다. 가장 완벽한 은폐는 감추지 않는 것이다. 눈에 띄는 자명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그 금기어는 국가의 신화이자 부당한 정권의 도구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리고 구술자들은 세뇌되어 자동화된 방식으로 그 금기어를 되풀이하며 금기의 대상에서 벗어나려 했다.

바로 ‘반란’과 ‘반란군’이다.

구술 맥락을 살펴보면 이 단어는 여러 가지로 세분될 필요가 있는 용어이다. 14연대 봉기군이거나 토착 좌익 사상가이거나, 구빨치산이거나, 신빨치산을 이르기도 한다. 어떤 때는 6·25전쟁에 남하한 인민군을 칭하기도 한다. 여순사건이란 명칭과 반란사건이라는 말도 차이를 가진다. 후자는 지리산 금족령이 해제되기 전까지의 토벌작전이 진행되던 시기를 의미하곤 한다.

이 단어를 말할 때의 어감, 정서 표현도 다양하게 변한다. 대수롭지 않게 자연스럽게 입에 오른 말을 뱉어내는 방식이지만 일방적인 적대감보다는 애증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산에서 먹고살 것이 없으니까 어쩔 것이여.”, “그저 짐 지고 올라갔다가 못 내려와서 같은 패가 되어버렸어.”, “똑똑하고 야문 사람이었어.”, “참 순진한 사람들이여.” “아이고 밤마다 징글징글하네.”라는 말들이 따라붙는다.

채록이란, 말을 옮겨 적는 일이지만 말 속에 담긴 섬세한 의미는 문자로 그대로 옮겨질 수 없다. 그대로 옮겼을 때 오히려 잘못된 인식 틀을 제공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부당한 권력이 사용한 그 단어를 지워나갔다.

역사의 진상을 규명한다는 것,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정명화가 필수이다. 역사의 판단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우리 시대의 주요한 가치 판단을 읽어낼 수 있는 명칭 부여와 역사 요소요소에 대한 적확한 개념어들을 부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껏 제대로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이야기였으리라. 정작 이야기로 풀어내자니 말은 자꾸 벽에 부딪히는 모양이다. 구술자는 힘겹게 기억을 뒤적여 말을 이어가지만, 조사자에게는 도통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수긍되지 않는 말들, 자꾸 다시 물음표가 찍혀간다.

당신들 살아나온 고단한 인생살이에는 같이 눈물짓고 고개 끄덕이며 손을 잡았다. 그러나 정작 당시에 처참하게 겪어낸 것들이 말해지면, 눈만 동그래지고, 자꾸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당신들은 다 아는 일들이고, 그렇게 겪어냈고, 그처럼 많은 이들이 사라졌는데 너희는 왜 못 믿겠다는 듯,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느냐 싶어 답답하셨을 것이다. 이해시켜 보려 할수록 자꾸 같은 말만 되풀이되고, 종국엔 당신 생각에도 참,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구나 싶다.

“10살짜리 딸이 보는 앞에서 총을 쐈어요?” “봤지. 마루에서 봤어.” “아버지 살려달라고 해보지 않으셨어요?” “안 했어.” “무서워서 못 했어요?” “아니, 뭐 죽일 줄 알았가니? 난데없이 총을 딱 쏴버렸지. 아버지를 죽인다고 말을 해, 뭣을 해. 아무 말 없이 총으로 탁 쏴버려.”

“그때같이 추운 날이 없어. 그 한겨울에 홑껍데기 무명 저고리 홑바지만 입고, 벌벌 떨면서 동방천에 다리를 놓았어. 지게 지고 바지게 메고 모래며, 돌을 가져다 내려놓으면 뒹굴어서 물에 떠내려가고, 다시 패이고.” “아무리 겨울이어서 수량이 적었다지만 그 넓은 섬진강 지류에 맨손으로 다리를 놓는다구요?” “총을 들이대고 언제까지 안 놓으면 다 죽인다는데 어쩔 것이여. 얼음은 얼어대고, 아이고 말도 못 해. 바짓가랑이에 얼음이 땡글땡글 열리고, 얼음을 떨어내면 유리같이 날카로운 얼음이 정강이를 쪼아버려. 피가 방울방울 맺혀.”

“산에서 배◌◌ 씨를 잡아왔어. 그 사람은 나보다 두, 세 살 더 먹었어(15~6세). 얼마나 맞았는지 혼이 나가버렸어. 동방천 공사에 동원된 온 면민들을 줄줄이 세워놓고, 너하고 갔던 동무들 앞에 가서 손가락질하든지, 눈으로 밝히라고 해. 그래, 96명을 가려내서 밤에 여기 학교(간문초등학교) 옆으로 가서 기관총으로 달달달달 갈겨버렸어.” “그 손가락질을 좀 하다가 멈추면 안 되었을까요? 그렇게 많은 사람을…….” “그 사람이 얼마나 뚜드려 맞았는가 혼이 나가버리고 정신이 없어.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 앞에 가서 우물쭈물하면, 너 나와! 너 나와! 그래. 법도 아니고, 법치 국가도 아니야. ”

“길거리에 내걸린 베어진 목들. 그 옆에서 몇몇은 또 다른 시신에서 귀를 잘라내고 있었어. 학교 파하고 집에 가는 길에 봤어.”

토지면 사람들이 3·1 만세운동 기념일에 맞춰 간전파출소가 보이는 이곳 저수지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런 말들에 그저, 그때는 그랬군요 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덤덤하게 말하는 것 뒤에 숨겨진 증상과 상처, 그들이 맞닥뜨렸던 트라우마가 된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어쩌면 애써 기억에서 몰아내려 했던 것들을…….

그것은 같이 앓겠다는, 그래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하고 무모한 성정 때문이었을 테다. 단순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들이 입안을 맴돈다.

뒤주에 숨은 아버지가 설령 죄가 있다 해도 아무런 확인이나 설명 없이, 어린 딸이 보는 앞에서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에게 즉각 방아쇠를 당겼다고? 그 긴 다리를 정해진 얼마만의 시간 만에 놓을 수 있을 만큼 온 면민이 모였는데, 아무리 총부리 앞이었어도, 모두 한낱 겁에 질린 어린애 집단으로 전락했다니. 누군가는 항거하지 않았을까? 추위와 공포에 사지가 떨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해도 어이없는 손가락질과 그로 인해 속절없이 죽는 것을 지켜만 보았단 말인가? 어찌 인간이라는 존재가 국가의 법을 구실삼아 국민을 집단학살하고, 즉결처분해 시신을 유기하는 일을 용납할 수 있었을까? 온몸으로 항거했어야지. 왜 분노하지 않았는가? <다음 호에 계속>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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