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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이 아니라 왜 있는가?문학칼럼 49 김숨 <뿌리 이야기>, 2015 제39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송은정 작가(문학박사)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 풍부하고 절묘한 표정을 짓는 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나무뿌리가 아닐까. (21쪽)

지난 호 이 지면을 통해 정찬의 소설 <가면의 영혼> 속 인간의 풍부한 표정에 대해 언급했는데 오늘 만날 소설가 김숨은 나무뿌리의 표정이 더 풍부하다고 하는군요. 세상에 드러낼 필요 없는 뿌리가 갖는 표정은 어쩌면 더 적나라하고 직설적이겠지요. 어둠 자체인 땅속에서 온 감각으로 세상을 지탱하며 지었을 표정은 원뿌리, 곁뿌리, 실뿌리의 형상으로 얽히고설키어 조형화되었겠지요. 뿌리란 어떻게 보면 그악스럽다 싶을 만큼 그러쥐는 힘이 강해 보이고, 혹은 독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공격적인 형상을 하고 있기도 하죠. 그것이 줄기와 가지와 잎, 꽃과 열매를 있게 하기 위한 내적인 힘들의 표정일까요?

소설 <뿌리 이야기>에 표정과 관련해 ‘미소 분석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한 모나리자 미소를 소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모나리자의 표정은 행복감 83퍼센트, 혐오감 9퍼센트, 두려움 6퍼센트, 분노 2퍼센트로 수치화해 분석된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녀 미소의 신비함은 83퍼센트의 행복감보다는 9퍼센트의 혐오감과 6퍼센트의 두려움, 2퍼센트의 분노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계가 표정을 읽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이기는 하지만, 누군가의 마지막 표정, 그 표정이 담고 있던 감정들이 무엇이었을까 짐작하는 내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까 싶어지기도 합니다.

<뿌리 이야기>는 마흔 살을 코앞에 두고 있는 여성 서술자가 사 년째 진전 없이 연인관계를 이어오는 미술가의 뿌리에 대한 상념들을 다룹니다. 미술가는 작품에 뿌리를 오브제로 사용합니다. 오브제로 사용될 뿌리는 갈아엎어진, 들려진 것들입니다. 이는 평론가 이태동이 지적한 것처럼 “기계문명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생명”을, 현대 사회의 어떤 힘으로 생명의 근원이 유기되고 황폐해지는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지요. 거기에 존재의 근원도 같이 언급됩니다.

서술자의 고모할머니 남귀덕은 위안부였고, 어린 시절 서술자의 방에서 같이 지냈던 그녀는 이불 속을 더듬어 서술자의 작은 손을 잡곤 했지요. 그녀의 손은 하나의 뿌리로 그려지고, 나중 뿌리를 오브제로 한 작가의 작품명 ‘남귀덕’이 되기도 합니다. 고모할머니의 손이 이불 속에서 뻗어오던 것에 대해 “그녀가 그토록 찾던 것은 흙이었다는 걸. 태어나고 자란 자리에서 파헤쳐져 내팽겨쳐진 뿌리와도 같은 자신의 존재…… 잎 한 장, 꽃 한 송이, 열매 한 알 맺지 못하고 철사처럼 메말라가던 자신의 존재를 받아줄 흙이었다고…… 뿌리 뽑혀 떠돌던 그녀의 존재를 그나마 내치지 않고 품어줄 한 줌의 흙.”이라고 표현됩니다.

또 뿌리는 서른세 살에야 자신이 돌도 안 된 나이에 입양된 아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 미술작가의 존재 근원에 대한 생각과도 연결됩니다. “버려지는 순간 버려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지 않았을까? 뿌리 뽑히듯 뽑혀 버려지는 순간 알지 않았을까? 부모님은 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별 충격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나 봐.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내게 사랑을 주었다고 확신해서겠지. 자라는 동안 부모님이 날 한결같이 사랑하고 아끼는데도 이상하게 놀이공원에 버려진 느낌이었어. 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아이를 일곱쯤 낳았을 거야.” 라면서 삶의 근원에 대한 애착을 드러냅니다.

터널을 뚫거나 도로를 내고, 아파트를 짓느라 재개발을 위해 파헤쳐진 땅으로 긴 세월의 기록을 드러낸 뿌리를 작가는 말려갑니다. 방부처리를 하고, 색을 칠하고, 촛농을 점점이 떨어뜨려 모양을 잡고, 패널에 수없이 많은 못을 박아 고정시킵니다. “뿌리를 장사지내는 기분, 관 속에 뿌리를 가두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작가는 고정적이고, 단정적인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패널에 뿌리를 고정할 때는 하나 더, 하나만 더, 딱 하나만 더 하면서 못을 박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뿌리라는 ‘자아’를 패널이라는 ‘세계’에 고정시키려는 안간힘일 수 있습니다. 옮겨진, 들어 올려진 자신을 다시 한번 고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지요.

자신이 유기된 존재였고, 불필요한 존재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존재에 대해 질문하며 괴로워합니다. 버림받은 기억을 가진 사람의 트라우마. 외상을 입은 그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왜 없는 게 아니라 있는가?”라는 근원적이고 실존의 문제에 닿아있는 질문을 던진다고 하네요.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요? 아직 없어지지 못하고, 여기 있는 것일까요? 당신은 여기에 있기 위해 뿌리를 수직으로 깊게 내리뻗는 심근성으로 시간을 인내하고 있나요? 아니면 소나무나 포도나무처럼 수평으로 얕게 뻗는 천근성으로 땅을 찢고 유방 뿌리를 지상에 내밀기도 하는 편인가요? 당신 뿌리의 속살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는 걸까요?

뿌리마다 특유의 냄새가 있어. 당신 겨드랑이처럼 습진 땅에 내려 물기를 흠씬 머금은 뿌리일수록 냄새가 짙고 깊지. 침묵하게 하는 냄새가 나. 억지로 침묵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침묵에 잠기게 하는 냄새. 웨이퍼처럼 외피가 쉽게 바스라지는 뿌리의 냄새는 뭐랄까 날벌레 떼 같아. 부산스럽고 삽시간에 흩어져버리지. 아카시아 뿌리에서는 톡 쏘는 냄새가 나. 냄새에 가시가 박혀 있어. 꽁치 가시처럼 자잘한 가시들이 냄새 새새에…….(12쪽)

뿌리가 갖는 냄새는 곧 그의 속성과 그 삶의 시간이 다 배인 것이겠죠. 김숨이란 작가를 느끼게 하는 멋진 표현들이 많은 소설입니다.

드러난 뿌리에 붉은 페인트로 쓰인 철거라는 글자. 그 뿌리를 껴안으면 심장의 위치에 철거라는 글자가 와 닿아 인두처럼 심장을 지져온다는 표현이 있어요.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을 철거하며 장사지내고 사는 것일까요?

“제발 그만 쳐다봐. 진짜 부담스러워할 거야.”

집안 화초들에서 새순이 나오는 순간순간을 놓칠세라 하루에도 수십 번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못하는 제가 듣는 핀잔입니다. 뿌리의 표정을 읽어내는 것은 고통스러울 것 같지만, 아직 이렇게 새순을 틔워올리는 것을 보며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며 위안을 삼습니다. 아직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이니까. 왜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 따위는 잊고, 그냥 있다는 것만에 감사하며. 보이지 않는 뿌리, 보이는 것들을 지탱하며 애를 쓰는 그 뿌리는 그 표정이, 그것의 냄새와 속성이 어떠하든지 생명의 근원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니까요.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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