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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시작으로부터문학칼럼 51-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2020.
송은정 (문학박사)

2021년 새해. 우리 이만큼 지나왔네요. 일상이 반복되며 시간은 끊김 없이 흘러가는 것이지만 인간은 그 연속의 패턴에 따른 인위적 분절을 상상하며 시작과 끝의 이름을 붙입니다. 올해 우리는 어떤 시작들을 인지하고, 그것으로부터 무슨 소중한 것들을 빚어낼까요?

정세랑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무엇으로부터라는 근원과 그 결과들이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서사화된 경쾌한 이야기입니다. 제목의 시선은 ‘심시선’이라는 미술평론가로 활동했던 여성의 이름이고, 소설은 그녀와 그녀로부터 시작된 자녀들의 이야기입니다. 모계 중심 가정의 “기세 좋은 여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로 읽힙니다. 그러면서도 한국전쟁 이후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이민을 갔다가 미국, 독일 등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민주화 운동을 겪은 ‘심시선’ 일생을 둘러싼 20세기 한국사 전반을 꿰뚫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깊이와 폭이 만만치 않음에도 이 소설은 민트향이 난다고, ‘사랑스런 인물들의 일대기’라고 소개(소설가 박상영)되지요. ‘청량함’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는 1984년생 정세랑 작가의 문장과 감각은 요즘 매체들에 익숙한 독자에게도 흡인력을 발휘하지요.

할머니의 전형성과는 동떨어진 예측불가한 ‘심시선’과 그녀의 딸들과 아들, 손자들은 우리 시대의 각 세대나 계층을 대표하며 다채로운 서사를 풀어갑니다. 뚜렷한 개성과 현대적인 감성 코드에 공감의 폭이 넓어서 아마 이 소설은 머지않아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31장으로 구성된 장편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이 생전에 남겼던 여러 행적, 인터뷰 자료나 자전적인 글들이 인용되어 시작됩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은 큰딸 ‘명혜’의 제안에 따른 각자의 모험이 그려지지요.

”기일 저녁 여덟 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83쪽)

12명의 인물들이 마치 게임하듯 제물을 찾는 하와이 여행 이벤트는 어느 독자의 표현대로 시트콤같이 전개됩니다. 10여 일간 하와이에 체류하면서 각자의 이상과 희망을 담은 소중한 것을 찾아내거나 이뤄내는 과정은 일종의 길 떠남이자 모험, 보물찾기이지요. 우리의 2021년 새해도 이런 나날이 되겠지요. 우리 삶의 서사와 가치관에 따라 서로 다른 소중한 것들,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마련해 가겠지요.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고, 잘해낼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은 아닐까, 아니 내 것은 너무 초라한 것은 아닐까, 이래도 되는 것일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겠지요. 자신이 없거나 부끄럽거나 혹 불가능해 보이거나 두려운 도전일 수도 있구요.

“그럼 좀 어때.” 좌충우돌 우당탕거리며 호기심과 흥미를 지닌 채, 하고 또 해보는 거지요. 그것이 바로 당신의 재능을 발현하는 길이라면요. ‘심시선’이 정의한 재능은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을 즐거운 일로 여기며 질리지 않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 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중략)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289쪽)

그러다 보면 도약의 지점들이 이십 년마다 한 번씩 큰 변곡점으로 나타난다고 하네요. 21세기가 시작되고 이십 년이 지나 이제 21년입니다. 올해부터 20년을 지속하며 시도해 볼 것들이 떠오르시나요?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의 이십 년을 버텨내세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모퉁이가 찾아오면 과감히 회전하세요. (중략) 모든 면에서 닳아 없어지지 마십시오. (229쪽)

몸도, 마음도 닳아 버리는 지속이 아닌, 여전히 샘솟는 기쁨을 찾아내는 아득한 반복으로 탈각의 지점에 도달할 수 있기를…….

이 재능의 발현을 위해 넘어서야 할 것은 폭력 앞에서 굴복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20세기 역사 속에서 자행된 부당한 폭력,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 담론,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힌 위축 같은 것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생존을 위협하는 건강 문제나, 생계 유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절망하거나 비관하는 일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그러하듯 소설 속 인물들도 여러 형태로 이런 폭력 앞에서 좌절하거나 용기를 내기도 합니다.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 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치욕스러운 경험도 요긴한 자원으로 썼으니 아주 무른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126쪽)

‘심시선’은 미끼로 유혹하면서 교묘하게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힘을 간파해냈고, 과감하게 그것에게서 벗어납니다. 참으면 당장의 달콤한 것들이 조금씩 주어질 것이라 달래고, 더 가혹한 폭력으로 위협해도 말이지요. 부당한 폭력을 분간해 내고서, 그에 대항하기 위해 ‘무르고, 순정하며, 슬프고, 유약함’을 바탕으로 한 이들과의 연대와 소통의 방식을 택했기에 그녀는 오히려 기세 당당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연대와 소통은 구분 짓기나 견고한 경계를 허무는 일이지요. 이 소설의 시작 지점들은 순종의 것이 아닙니다. ‘심시선’은 두 번의 결혼을 하지요. 첫 번째 남편 요제프 리는 독일 사람이지만 터키인, 인도인, 중국인으로도 보였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은 혼혈인이지요. 인종과 국가의 구분, 남녀 성, 젠더의 경계도 넘어서며 서로를 이해해 포옹하기에 이 소설을 읽고 난 다음 마음이 환해지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331쪽)

그런 사람이 당신 가슴에도 있겠지요. 2021년, 그 사랑으로부터 힘을 얻어 늘 행복을 발견해내며 기쁨의 미소를 짓는 한 해가 되길 바라봅니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기 내 모험의 여정을 즐기면서, 삶을 사랑하며 우리 좀 살아보기로 하지요(Live a little.).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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