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송은정 문학칼럼
채록 서사 <산그늘에 묻은 말들>-1기획 연재 3 – 여순10·19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기원
송은정 (문학박사,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고재순 씨의 못다한 말을 복원하는 채록

2020년 5월 25일.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길.

고적한 한옥들 사이로 난 꽃길, 수련이 피는 연못을 지나 고재순 (1942년-호적상, 실제 나이 82세) 씨를 만나러 갔다.

마을 앞 정자까지 마중 나온 고재순 씨가 뒤돌아서 앞장선다.

너무 쉽게 뒷모습부터 보인 사람.

등으로부터 흘러나온 살아낸 시간과 서사가 무방비하게 그림자로 드러난다.

첫 만남에 습관으로나, 의례적으로라도 한 번쯤 슬며시 이를 내보일 만도 하지 않은가. 긴장하고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어색함을 떨쳐보려 웃음기 섞어 건넨 몇 마디는 부질없이 마주 앉은 사이로 떨어져 내린다. 섣부르게 말과 마음을 열어보려 내민 열쇠 같은 미소는 반응 없이 덤덤하게 말리어 바닥에 내려앉았다.

삶의 극성스러움 한 번 부려보지 않은 것 같은 여린 이목구비였다. 부드러운 얼굴 윤곽에, 여느 유약해 보이는 이들이 무기처럼 장착하곤 하는 미소마저 지워버린 밋밋한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담벼락이나 울타리 같은 가림막을 치고 숨으려는 뜻도 없어 보였다. 방비책 하나 없이 느슨했다. 표정이 실리지 않는 얼굴로, 높낮이 변화 없이 물음에 답할 뿐.

당신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려면 몇 권의 책을 써도 모자랄 것이라며 눈물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그녀 살아온 삶에도 구비구비 죽음의 그림자들이 지리산 산그늘만큼이나 깊었고, 정리해 본 서사들은 섬진강물처럼 여울진 구구절절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이야기를 그녀는 짧은 햇살을 거두는 깊은 골짜기 해질녘 공기처럼 식어가는 온도로 대답했다. 눈물은커녕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거나 당신 상처의 아픔을 호소하지도, 당신 생각에 대한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

뒷모습부터 보인 사람, 표정이나 감정을 싣지 않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무수히 많은 공백으로 쓰이는 간결한 시 같다. 채록은 구술자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는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마저 읽어내야 한다. 고재순 씨는 풀어내야 할 암호와 여백이 많은 구술자였다. 결국 이 채록의 형태는 고재순 씨의 속마음을 독해하기 위한 그 시간과 장소로의 여행이자 상상의 서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리산골 메아리로 맴돌고, 섬진강물로 여울지는 못다한 고재순 씨의 말을 되살려 보았다.

72년 전 여순10·19가 일어났을 때의 아픈 기억을 떠올려 이야기해 보라 한다.

스산한 그늘이 드리워진다.

늘 그랬을까만은, 찾아온 이들의 주문에 답하려 하니 나 살아온 길은 그랬던 것만 같다.

10살이었던 그때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볕 들지 않는 북으로 난 골짜기 같았다.

1948년 10월, 나는 구례군 토지면 문수리 상죽마을에서 늘 그리운 할머니와 광의면 지천리에서 20살에 시집와 천변댁으로 불리던 어머니, 당시 43세였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10살인 나는 이미 내 밑 세 명의 동생을 잃은 뒤였다.

아버지 이름은 고광옥인디, 똑똑히 모르겠어. 고광옥인가, 고광옥으로 알고 있는디 물어볼 사람이 없어. 엄마는 왕남진. 형제는 2남 2녀인데 셋이 다 죽었어. 아니, 어려서 죽었어. 아기 때. 그전에는 아기일 때 많이 죽었어. 홍진(홍역)에 죽고, 어쩌다 죽고. 나랑 같이 상곡, 외곡 돌아다니면서 깽맥이(농악) 치는 데도 따라다니고 했는디… 그러다가 그렇게 되고, 갓난애일 때도 그러고…. 내가 첫째인데 죽은 동생들이 영 똘똘하더라고, 나는 바보 같아도. 근디 그것들이 싹 가불데.

그래서 엄마가 반이나 미쳤어. 자식 셋이 죽고 나니 맨발로 저 산, 돌팍 있는 데로 홀떡훌떡 뛰어다니고 그러더라고. 애들이 한꺼번에는 아니었어도 싹 가분께. 막둥이를 보내놓고 더 그러드만. 이런 데서 말해봤자 누가 알아줘, 아무 쓸데 없잖아. 그러니까 산에 가서 막 온 돌너덜 밭을 맨발로 뛰어다녀. 우리 산중에 농사지으러 가면 그런 데를 뛰어다녀. 가슴 아픈께.

삽화/이이룸

맨발로 돌너덜을 훌떡훌떡 뛰어다닌다고 가슴에 자식 돌무덤 셋으로 맺힌 어머니 한덩어리가 내려갔겠는가.

나도 또롱또롱 귄 있던 동생, 풍물 장단 맞춰 상곡, 외곡마을로 지신 밟는다며 꾸욱꾸욱 누나 발자국 뒤따라 종종대던 동생, 옹알옹알 이뻐할 일밖에 없던 갓난쟁이 동생을 잃었다. 그때마다 넋 나간 어머니의 모습이 산등성이에서 희끗희끗 널뛰었다. 이웃 아짐들은 독하게 말 한마디 않고, 저렇게 혼자 피투성이가 된다고 쯧쯧거렸다.

야물고 일 잘하는 어머니가 내색 없이 눈만 뜨면 일하러 나가시면 나는 늘 애가 닳았다. 문수국민학교 2학년 교실에서 선생님이 칠판에 쓴 글씨는 우리 엄마는 어디 계실까로만 읽혔다. 나 놔두고 도망가버린 건 아닐까 싶은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할 수 있는 건 홀로 남은 손녀라며 애잔해 하시던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꼬옥 움켜쥐는 것뿐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데스크  yeosunews@daum.net

<저작권자 © 여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