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전후 보도연맹사건으로 두 오빠를 하루 아침에 잃은 채 72년의 응어리진 한을 가슴에 묻은채 살아온 여수 돌산읍 거주 박영자(89세)씨

6.25 참전 부상 당한 남편 평생 후유증에 고통…국가유공자 미지정 납득 안 돼

보도연맹사건 연루 두 오빠 희생당해 집안 풍비박산…막내딸 명예회복 안간힘

<6.25전쟁 72주년, 수많은 사연을 지닌 채 그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가족들이 있다. 여수 돌산읍에 거주하는 박영자(89)씨는 비극적인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다. 전후 여수보도연맹사건으로 두 오빠를 잃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전장에서 다친 남편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평생 후유증을 앓았다. 피맺히 한을 지닌 채 기력은 갈수록 쇠하지만 그날의 생생한 기억만은 또렷하다. 50대 막내딸이 부모님의 해원, 명예회복에 발벗고 나섰다. 편집자 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 ‘0629073’ 당신의 군번 번호를 외우셨습니다. 나라사랑하는 마음이었을까요. 어쩌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건만 국가가 해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는 서운함이었겠죠”

대학에서 강의하는 김은경(51) 씨는 지난 1995년 작고한 선친(김옥동)의 명예회복을 위해 천리 길을 달려 노모, 박영자(89세) 씨가 계신 고향 여수를 찾는다. 7남매 중 막내딸로 모친의 응어리진 한을 풀어드리려 최근 여수행이 잦아졌다.

아버지 김옥동 씨는 1948년 군에 입대했다. 6,25전쟁이 발발되자 금성지구전투에 참전해 쏟아지는 총탄과 폭격에 발목 우슬, 엉덩이 파편상을 당했다. 대구27육군병원을 거쳐 부산 제5육군병원에서 치료했다. 부상이 심하여 더 이상 전투참여가 어렵다는 판정으로 1953년 명예제대했다. 이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군 제대와 동시에 아버지는 아내 박영자(89)씨를 만나 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대로 병원치료조차 받지 못해 제대 후 3년 동안 목발을 짚었다. 병원치료와 치료약 대신 어머니는 누군가로부터 통증에 좋다는 얘기를 듣고 동네 공중 변소통 안에 돌을 담은 긴 소주병을 변속에 집어넣어 변액을 취해 치료에 사용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또 다른 후유증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심장병과 공황장애였다. 15년을 민간요법, 침, 뜸, 약에 의존해 치료했다. 당시에는 이 두 증상이 전쟁후유증임을 몰랐다. 평생 약을 달고 살았으나, 인과관계가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부상 후유증은 반세기가 지나 임종 전까지 아버지를 괴롭혔다. 그 동안 국가로부터 어떠한 지원과 혜택은 받지 못했다. 1994년 갑작스런 합병증으로 병상에 눕게 됐고 1년 뒤인 1995년 가족들과 이별했다.

슬하에 자식 7남매를 두었으나 제대로 교육도 못 시켰다.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병원진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참말로 몰랐다. 설사 병원진료를 받았어도 그 당시 부상을 이유로 진단서를 작성해야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 사실 먹고 살기 바빴고 돈이 없어 병원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노모의 말이 막내딸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했다.

아버지가 왜 그토록 국가유공자 지정을 바랬는지 어려서는 잘 몰랐다. 평생을 후유증으로 고생하신 아버지와 뒷바라지한 어머니를 생각하니 너무 억울했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고 싶었다. 

그녀는 순천보훈지청을 찾아가 그 연유를 따졌다. 신체적 희생의 장애정도가 미약하다는 원론적인 답변이었다. 지난 1995년 부친 사망 이후에도 신청했지만 ‘공무수행 중 상이는 인정되나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군복무 중 입은 부상으로 인하여 사망하였음을 입증할 의학적인 거증자료로 부족하다’는 대답이었다.

최근 선친의 국가유공자 재심신청이 가능하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무조건 안된다며 고자세를 보이던 보훈지청이 태도를 바꾼 것. 기쁨에 앞서 분통터지는 일처리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버지는 6.25 참전 상이용사인데 기준 미달로 국가유공자가 안 된답니다. 여수시가 지급하는 참전 유공자 미망인 월 5만원 수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친의 명예회복입니다. 평생 나라를 원망하며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려야죠”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돼 오빠가 수장돼 희생된 곳으로 여겨지는 애기섬을 박영자씨가 바라보고 있다.<사진 김은경 씨 제공>

"노모의 기구한 삶, 보도연맹사건 연루 두 오빠 희생, 

 남편은 참전 뒤 부상 후유증 한 평생 고통에 시달려"

막내딸은 노모의 기구한 인생이야기를 듣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보도연맹사건에 희생된 외갓집의 명예회복이다. 노모는 72년 전 보도연맹사건의 피바람이 불던 그날의 생생한 기억을 또렷이 끄집어냈다.

그 당시 외갓집은 여수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였다. 돌산에 땅이 널렸고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큰할아버지가 여수에서 거상으로 대상을 운영했다. 지물표, 쌀가게 등 여수에서 가장 큰 상회 수십 개를 운영했다.

전후 보도연맹사건은 한 집안의 모든 걸 빼앗아갔다. 일본 유학파 출신 군청 공무원 큰 오빠(박재순), (구)여수일보를 정재완 씨와 함께 창간한 작은오빠(박재석)는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었다.  7월경 큰오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간 뒤 죽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형님의 행적을 쫓던 작은 오빠마저 끌려가 모진 고문으로 앓다 며칠만에 죽었다. 집안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돤 관변단체이나 6·25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 따르면 과거사진실화해위원회에서 여수보도연맹사건 조사를 통해 48명의 피해자를 보고했다. 하지만 박영자 씨의 두 오빠 사연은 신고 접수가 되지 않아 진화위 조사 피해 대상자에서 빠져 있다.

고통의 시간, 72년의 세월이 흘렀다. 머리가 희끗해진 노모는 가끔 그 악몽을 소환한다. 얼마나 가슴에 한이 사무쳤으면 저럴까. 

막내딸 은경씨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여순사건위원회 신고접수 이후 명예회복까지 연로한 모친과 함께할 날이 많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그녀는 또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여수로 향한다.

김병곤 기자  bibongsan8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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