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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두로 올려보는 한산도대첩과 여수
비고 리조트 김창주 대표이사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 시작 3달이 채 되기 전에 옥포·당포해전에 이은 3차 전투로 크고 작은 전투까지 포함해 8번째 해전이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조선 수군은 2차 전투까지 7차례 연승으로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평양까지 진군했던 일본은 수륙양용의 서해 진군이라는 한쪽 팔을 잃어버렸다.

부산을 함락시키는데 1일, 다대포까지 2일, 한양까지는 20여일로 쾌속 질주하던 초기전황이 이순신의 개입으로 병참과 보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한양과 평양에서 발목이 잡혀 더 이상 북진을 할 수 없었다. 

지지부진한 전황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질책이 뒤따랐다. 이에 부산에서 가토, 구키, 와키자카 등 왜군 주요장수들이 모였다.

전략회의 결과는 본영 여수와 이순신을 치자는 것이었다. 이순신과 그 본영인 여수를 직접 목표로 일본의 전체 수군과 육군을 회군시켜 여수를 침탈하고 초토화시킬 계획이었다.

충무공은 신중했던 이전 전투와는 달리 한산대첩에서 선제적으로 치고 나갔다. 얕고 좁은 견내량에서 진을 치고 있는 왜군을 넓은 한산바다로 유인해 맞장을 떴다. 

여기서 세계 해전사상 최초로 학익진이 사용되었다. 넓은 바다에 커다란 학이 두 날개로 왜선들을 끌어들여서 거미줄에 나방을 희롱하듯 전열을 깨트리고 궤멸시켰던 것이다. 1592년 7월 8일 한산대첩에서 왜선 73척 중 59척을 격파했다. 

이 전투로 사실상 중국과 인도까지 넘봤던 야욕은 분쇄되었다. 그 다음해부터 사실상 한반도 남해안에 머물면서 전쟁은 정체상태로 빠지게 된다.

거북선은 당포전투에 이어 한산대첩에서도 2대가 출격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이번 김한민 감독의 영화인 "한산:용의출현"이라는 제목은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이순신과 여수를 타깃으로 벌어졌던 한산대첩에서 특이한 점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항상 신중했던 충무공이 이때만큼은 서둘렀고 불확실성을 감수했다. 

왜냐하면 일본 육군이 전라도 금산까지 내려오고 있었고, 왜 수군도 여수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여수 본영을 잃어버리면 조선의 수군도, 이순신도 그 어떤 희망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산대첩은 여수와 충무공, 우리 선조들 때문에 일어난 전 세계해전의 불멸의 금자탑이다. 영국과 일본 등 해군 제독들에겐 신의 전쟁이요, 전술학자들에겐 꿈의 전술과 입신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장군의 업적은 신화가 되었다. 

혹자는 한산대첩과 여수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반문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여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평소 이순신 장군을 존경해서 관련 자료와 도서들을 섭렵했지만 특별히 한산대첩은 여수사람으로서 특별한 감회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번 김한민 감독의 영화가 평생 처음으로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 때문에 서울 가면서 한산대첩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한산이라는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화두를 올려본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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