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정 (순천대 외래교수)

12월, 송년 행사와 연말 모임이 이어지는 때이다. 이런 때를 대비해 노래 몇 곡쯤은 예비해 두어야 한다. 노래방 문화가 발달한 요즘 그깟 것은 일도 아니고,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쓰냐는 대범한 사람도 많을 것이지만 소설가 이청준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나 보다. 가사와 곡조를 완전히 외워두지 않으면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 때의 일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인근 지역인 장흥 출신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을 곁에서 지켜본 적 있는 이들은 그를 한마디로 “수줍음이 많은 선비였다.”고 말한다. 그 스스로 작품과 작가노트 등에서 자주 언급했듯 사람 많은 자리에는 얼굴을 내미는 것을 거북해 했으며, 나타나더라도 최대한 말을 절제하고, 특히 좌중에서 다른 사람의 험담이 나올 때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지난 7월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이청준 작고 10여 년 만에 작품집 34권을 완간해냈다. 작품집 34권이라는 숫자가 말해 주듯이 여느 소설가보다 작품 수가 많은 그가 할 말이 없었을 리가 없다. 어디를 가도, 어떤 상황에도 풀어낼 이야기보따리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엄격하게 스스로를 절제했으며,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이청준은 작품 속에서도 ‘진술 공포증’을 앓는 인물을 자주 등장시켰다. 그는 예술가, 그 중에서도 소설가를 중심인물로 하는 작품이나, 소설 쓰기를 메타적으로 조망하는 형식의 작품을 통해 ‘진술’이 숙명인 작가들의 고통을 드러내보려 했다. 작가란 남들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할 수는 없는 존재임은 물론 허툰 말이 아닌 진실한 말을 해야 하고, 금기시되거나 억압되는 것마저 드러내고, 말해야 한다는 진술에 대한 의무를 지닌 존재이다. 또한 작가는 필연적으로 진술에 따른 공포를 감내해야 하는 존재이며, 무질서한 말의 구조들을 좀 더 선명하게 조율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의 작품에서 ‘말’은 ‘노래’로 다르게 표현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노래하는 것에 대한 이청준의 고충 역시 작가로서의 숙명에 대한 고민과 동일시될 수 있다.

1972년 12월 이맘 때 노래가 질펀히 흐르는 모임 자리에 대한 단편 <현장사정>. 등장인물은 장흥 출신의 작가를 떠올리는 J읍 출신인 인호와 광주(K시) 토박이 출신 동훈, 장흥과 광주 사이의 영암(Y읍) 출신의 현석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동문이고, 대학 역시 서울에서 함께 다닌 친구들이다. 이들 중 현석은 ‘새농촌 연구회’라는 농촌단체에서 일하는데, 이곳에서 주관한 ‘새농촌봉사상’을 받았고, 두 달분의 월급에 달하는 상금을 받아서 두 친구와 연구회 직원들을 한자리에 초대한 술자리를 연다. 법을 공부하고 판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인호는 이날 모임에서 부를 노래를 종일 흥얼거리며 연습 했으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만다. 술자리에 ‘새농촌 연구회’의 강회장이 동석한 것이다.

강회장은 말재간이 대단한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는 국회의원이었으며, 그 자신도 정치에 꿈을 둔 인물이다. 농촌을 위한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강회장이니 만큼 인호는 그들의 일에 동의하며 나서서 돕겠다는 뜻을 가진 바 있다. 그러나 그 일들이 권력을 가진 강회장의 입을 통해 발설되는 순간 의미의 순수함이 왜곡되거나 퇴색해 보인다.

“나는 공연히 뭔가 귀중한 것을 빼앗기고 있는 듯 기분이 허전해지고 있었다.”

순수한 마음과 뜻이 권력자의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하나의 구호가 되어 강압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것은 인호가 이날 부르려 했던 숱한 노래들을 끝내 강회장에게 빼앗기는 순간들에서도 일관된 작가의 의도를 읽어볼 수 있다. 이청준은 <연>이나 <씌어지지 않는 자서전> 등 수많은 작품에서 어린 시절부터 애수처럼 몸에 남아있는 노래에 대해 수차례 언급하며 노래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바 있다.

고향에서의 추억이 담긴 시간들과 삶의 공간 속에 녹아 있는 평범한 이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런 노래. 한 곡 한 곡 삶의 의미들이 녹아있던 노래들을 강회장에게 모두 빼앗긴다. 강회장의 노래는 번지르한 말로 좌중을 휘어잡은 후에 나오며, 강한 확신으로 분위기를 띄웠으며, 열정까지 더해져 있다.

인호는 끊임없이 자기가 노래할 차례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쉼 없이 부를 노래들을 되뇌이며 준비를 하지만 매번 강회장에서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정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길 때는 나는 그 이야기의 서두를 위해 얼마나 혼자 망설이게 되는지, 입을 다물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악을 쓰고 나설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잘못 이야기를 꺼냈다간 형편없이 묵살을 당해 버릴 것 같기도 하고.”(184쪽)

말할 수 없는 이, 노래할 수 없는 이들이, 말문을 막히게 하고 노래를 빼앗는 자들에게 맞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아니 말의 힘과 노래의 위안이 강압에 억눌리거나 강탈당하지 않는 방법, 그 고유한 의미를 이어가게 하는 방법, 현장 사정에 잘 맞는 대처법은 과연 무엇일까? 현장 사정이야 늘 유동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니 그 때 그 때 노래는 새로 태어나야 할 것이다. 매번 다른 현장 상황에서 미리 준비한 노래들은 소용없게 될 수 있다. 현장에서는 지금 바로 여기를 인식하며 확인이 아니라 확신을 가진 행동이 필요하다.

2017년 송년 모임에서 당신은 과연 어떤 노래로 그곳 현장 사정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녹아들 수 있을지? 아무쪼록 당신은 마이크권을 너무 휘두르지도 말고, 속절없이 노래를 빼앗기지도 않기를 바라본다. (2017. 12. 20.)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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