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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동화 속에서 발견하는 따뜻한 월동지순천대학교 송은정 외래교수

순천만습지 갈대숲으로 흑두루미가 찾아왔다고 한다. 그 어느 해보다 많은 개체수가 관찰되고 있다고.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땅을 떠나와 4월까지 월동하게 된다는 천연기념물 228호인 흑두루미. 오랜 세월동안 흑두루미들은 그들의 축적된 경험들을 통해 순천만이란 곳을 익숙한 서식처를 떠나 머나먼 거리를 날아 건너게 할 만한 따뜻함을 지닌 월동지로 유전자 속에 새겨두고 있다는 뜻일 게다. 

어떤 생명체가 매년 잊지 않고 찾아와 1년의 반을 지낼 장소로 선택된 곳인 순천만. 그곳, 그 장소는 아마도 이 여행자들에게 늘 새롭게 발견되는 장소일 것이다. 우리가 평이하게 비슷비슷해진 도심 속에서 자동화된 일상을 살게 되는 공간화 된 장소 같은 곳이 아니라, 매번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그곳에서만의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게 하는 하나의 특별한 장소가 되는 곳일 게다. 
 

무의미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로 그대는 어디를 꼽을 수 있는가? 그 장소의 소중함은 자체의 존재만으로 특별해지기 보다는 그 안에 머무는 이가 그 공간들과 어떤 관계들을 맺어 가느냐에 따라 의미의 부피와 밀도가 달라짐으로서 형성되는 것이지 않을까? 때문에 특별한 장소가 있기보다는 주변을 모두 소중하게 만드는 특별한 사람이 우선한 것일 수도 있다. 
 

아름답게 바라보는 맑은 눈을 가진 사람, 그리고 대상의 본질 그대로를 읽어내고,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 정채봉의 동화에는 그런 주인공들이 있다. 순천만생태공원 입구를 바라보고 왼편으로 강둑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소박하게 꾸며진 정원들 너머로 순천만 생태문학관이 나온다. 사립문 너머 장독대도 있고 담장에는 소쿠리도 매달린 초가집 형태로 된 문학관이다.

 

이곳은 순천 출신 소설가인 김승옥과 동화작가 정채봉을 기리며 그들의 문학적 행적들을 모아놓고 있다. 정채봉(1946~2001)은 순천 해룡 출신으로 광양에서 성장하여 광양농고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1973년『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꽃다발』이 당선되어 등단했고, 1978년부터 샘터사에 입사해 작고 시까지 근무하며 꾸준한 창작활동을 한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교과서에도 실리고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어 상을 받은 바 있는 <오세암>이 있고, <초승달과 밤배>, <생각하는 동화>시리즈 등이 있다. <생각하는 동화>는 성인들을 위한 동화로 문학적 경계를 허문 작품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작가 정채봉이 1998년 간암 선고를 받은 이후 투병하면서, 작고 한 해 전인 2000년 출간한 작품이 장편동화『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이다. 이 작품 속에는 7살에서 8살 사이의 사내아이 ‘계수나무’라는 천진한 소년이 등장한다. 외할머니 댁을 떠나 친가로 향하면서 계수나무는 동구밖에서 보는 모든 것에 안녕을 고한다. “당산나무야, 안녕.”, “까치야, 안녕.”, “물방앗간아, 안녕.”, “징검다리야, 안녕.” / “참새들아, 미안하다.”, “잠자리들아, 미안하다.”, “도토리 나무야, 미안하다.”
 

개구쟁이인 이 아이의 본래 이름은 ‘박계수’이지만 ‘계수나무’라고 불러줘야만 대답한다. 친구 ‘백운’이는 ‘하얀 구름’이라고 부르고, 키우는 토끼의 이름은 ‘자전거’이다. 그 토끼를 잘 길러 자전거를 살 계획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세상 모든 것들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읽어내는 동화 속 ‘계수나무’라는 아이를 만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다. 이 아이는 익히 잘 알려진 정채봉의 대표작인 <오세암> 속 다섯 살 ‘길손’이와 닮아있다. 

 

나의 셋째 별명은 꿈쟁이다.
나는 때때로 동무들한테 이야기하곤 하였다. 
“저기 저 수평선 너머에를 갔었어. 너그들 못 가보았지? 그래, 나는 가보았다. 거기에는 흰구름네 집이 있었어. 커다란 솜틀 공장이야. 여러 가지 구름 모양이 지어져 나오고 있었어. ...... 한쪽에서는 하늘을 한 바퀴 돌고 온 그름을 빨래하고 있었는데 정말 구정물이 말도 아니야. 공장의 검은 연기에 그을린 것, 핏빛 같은 노을을 닦은 것. 언제 갔었느냐구? 어제 밤에 갔었다니까. 꿈? 그런 것을 꿈이라고 하는 거야? 아니야. 어린들이 우릴 속이려고 꿈이라고 하는 거야. 진짜는 하느님이 우리한테 날개를 주어서 밤사이에 여행시켜 주는 것이야.......”

“여기 이 가지에는 꽃이 피었잖아요. 엄마 몸뚱이를 베어버렸는데두요. 아기가지가 나와서 꽃을 피운 거라구요. 나는 이 꽃가지가 좋아서 하루에 스무 번도 더 보러 다니는 걸요.”

 

태초에 아담이 모든 사물들에 첫 이름을 붙이면서 그들이 존재를 드러냈듯이, 인디언들의 이름붙이기가 그러하듯이 계수나무는 모든 것들의 존재 자체를 투명하게 읽어낸다. 쓰러지는 벼포기의 비명을 들을 수 있는 감성으로 자연과 교감하는 ‘아담의 언어’를 가진 인물이다. 어른들이야, 매번 지나가버린 노래를 뒤쫓아 가며 허탕을 치는 것처럼 흐려진 눈으로 자신의 생각에만 얽매어 대상의 한 일면만 보거나 자신과의 유사성의 한계 내에서만 단정해버리지만, 계수나무는 세상 모든 것들과 아주 쉽고 편안하게 교감하는 것이다. 
 

어른들이 ‘아담의 언어’를 잃어가게 하는 요소들은 작품 속에서 몇 가지의 예로 등장한다.   소제목 <줄달리는 사람들>들에서 언급되는 편 가르기와 힘겨루기로 인한 문제이다. 윗들이와 밑들이 마을 사람들 간의 이해를 중심에 둔 갈등이다. 또 <도망자와 지프차>, <치이마가 바람에 펄럭입니다.>에서 드러나는 국가나 이념에 의한 배제와 대립의 문제, <힘 있는 사람과 노래 잃은 사람>, <향기는 어디에로 흐르는가>, <이사 온 친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소유와 돈을 둘러싼 탐욕,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구분하는 것의 문제 등이 계수나무에게는 “어른들 때문에 머리 아파”라는 고민을 갖게 한다.
 

구분 짓고, 배제하고, 배치하는 현대 사회의 이분법적 대립 속에서 동화는 정상과 비정상, 옳고 그름이 혼재하는, 포용이 허용되는 총체적 세상을 지향한다. ‘계수나무’는 작은 각시의 소생이고, ‘하얀구름’은 반대로 작은 각시 때문에 버림받은 본처의 자식이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연순네와 바보 고봉이, 탈영자, 소똥을 주물거리며 농사짓는 기달이 등이 함께 하는 마을이기 작품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비정상이라고 배제되거나 감금되지 않고 경계 없이 함께 하는 총체성에 대한 문학적 지향이다.
 

마을 간의 갈등이 큰 태풍과 해일 앞에서 무의미해지듯이, 자연의 순리에 대한 순응적 차원에서의 문제해결과 할아버지의 은장도로 상징되는 인간 의지의 차원에서의 문제해결 노력은 정채봉의 생태주의적인 작가관과 동심을 지키려는 작가정신을 드러내 준다.  
 

자신의 내면의 문제에만 골똘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한쪽으로만 몰아가는, 자신에게만 특별한 것에 의미를 붙이는 어른들과 달리 정채봉의 동화 속 어린 아이들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모든 것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그 이름 부르기가 계속되는 한 우리를 둘러싼 주변은 어느 곳이나 특별함을 간직한 장소가 된다. 그 장소, 그 세계는 우리에게 언제라도 따뜻한 위안이 되는 월동지가 되어 줄 것이다. 
  

데스크  yeosune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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