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자수첩
선조들의 엽기적인 신고식 면신례(免新禮)데스크칼럼> 김현석 편집국장

지금 대학가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0T) 행사로 떠들썩하다.

대학 선배들은 이제  갓 고교를 졸업하고 새내기로 들어올 신입들을 그냥 놔두는 법이 없다.

각 학교의 빛나는 전통과 익숙한 관례에 따라 신입들을 길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신입들은 그들 앞에 놓인 대학입학의 첫 관문이 바로 이 OT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통과의례로 받아들이고 잘 버텨내야 비로소 한 조직의 구성원으로 환영받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새내기들을 길들이려는 선배들의 신고식은 초짜 신입들에게는 매우 감당하기 힘든 고역의 순간들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아직까지도 OT현장에서는 핸드폰 압수, 기수별로 얼차례, 소주•맥주•막걸리 혼합주에 정신력 함양 훈련 등이 각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강행되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대학당국 관계자들은 혹시 사고라도 터질까봐 매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신입 신고식이 강압적으로 호되게 진행되는 데는 우리 선조들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근엄하기만 할 것 같았던 조선시대 선비들도 신입들을 다룰 때는 지금보다 더 엽기적이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들은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 성균관에 각각 배속되었지만 곧바로 정식발령을 받지는 못했다.

이들에게는 ‘면신례’라 부르는 최종 통과의례가 남아있었다. 힘들게 공부해 공직자가 되었건만 당시 이들은 고참들로부터 ‘新禮(신례)’가 아닌‘新來(신래)’로 불리며 오늘날의 ‘신삥(신입의 속어)’ 취급을 받았다.

신래를 면하는 면신례 신고식을 버텨내야 비로소 정식 업무를 맡을 수가 있었는데, 문제는 이 기간이 장장 50일이 넘을 때도 있었다는 것이고 방식 또한 엽기적이라는 것이다.

율곡 이이도 ‘면신’이 되지 못해 낙향했을 정도로 신고식은 고역이었다.

선배 관리들은 조직에 들어 온 신래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새귀신’이라 부른다. 말석에도 그가 낄 자리는 없다. 얼굴에 흰 분칠을 한 채 누더기 옷을 입고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수모를 당해야 한다. 또 연회를 열어 선배들을 대접해야 한다.

“새로 온 귀신 暘鄭臣(양정신)은 듣거라! 생각건대 넌 별 볼일 없는 재주로써 외람되게도 귀한 벼슬길에 올랐겠다... 거위, 담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즉각 내와 우리에게 바치도록 하라” (토지박물관 소장) - 승정원일기 산처럼出 p139

우선 신래들은 자신의 신상을 적은 종이(刺紙)를 들고 고참들 집으로 여러 번 인사를 다녀야 한다. 종이는 두껍고 넓으며 커야한다.

이 종이 3장이 무명 한필 값에 해당할 정도로 비용이 적지않다.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종들에게도 뇌물을 줘야한다.

선배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소속 관청에서 벌일 잔치비용을 뽑아낸다.

봄에 교서관의 ‘홍도연’, 초여름 예문관의 ‘장미연’, 한여름 성균관의 ‘벽송연’ 등이 이것을 밑천으로 삼아 열린다.

‘허참례’ 의식도 필수다.

참여를 허락한다는 의미의 ‘허참’은 잔칫상 준비를 말하며, 술·고기·과일 등을 세 개씩 마련하는 3의 수로 다섯 차례 지내고 이어 5의 수로 음식을 준비해 세 차례 지낸 다음, 다시 7이 수로 시작하여 9 수에 이른 다음 마친다.

특히, 사초를 담당하는 예문관의 면신례는 견디기 힘들기로 유명하다.

연회를 주재하는 상관장이 아랫자리로부터 윗자리까지 술잔을 돌리면 차례로 일어나 춤을 추면서 벌주도 받아먹는다.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동석자들은 손뼉을 치고 허리를 흔들며 예문관의 별칭인 ‘한림별곡’을 합창한다. 헤어질 때쯤은 이미 날이 밝은 새벽이다.

연회자리에는 현직관원 외에도 그곳을 거쳐간 대신들도 선생자격으로 참석하는데, 대신들의 자리는 연회의 우두머리인 상관장 윗자리가 아닌 아랫관원들 사이에 끼인 곳이다.

이 자리에서 신래는 ‘紗帽(사모)’를 거꾸로 쓰고 두 손은 뒷짐 진 채 머리를 숙이고 대신들 앞에 나아가 두 손으로 사모를 받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외운 벼슬이름을 대면서 선배들의 요구에 따라 ‘희색(喜色:기쁜 표정)’과 ‘패색(悖色: 성낸 형상)’을 번갈아 하고, 별명을 부르면 그대로 흉내내야 한다.

벌칙을 받으면 벌주를 마신 후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얼굴은 오물로 칠한다. 겨울철엔 물에 들어가고 여름철엔 벌에 쏘이고 때로는 매질까지 당한다.

손 씻은 물을 먹거나 진흙뻘 연못에서 고기잡이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이 정도는 약과다. 미친년 오줌 받아먹기, 자기 부모 이름 적은 종이 태워 먹기도 등장한다.

엽기적 방식들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쳐 맞이하는 면신연 잔칫날에는 동료들 간의 친목을 다지는 계가 결성된다.

계원들은 잔칫날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명단을 각각 한 장씩 나눠 갖는다.

당시 조선을 움직이는 핵심 부서에서는 이러한 면신례를 통해 조직의 위계질서를 다잡으면서 장차 국가 대사를 짊어지고 갈 조직원들 간의 결속을 꾀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독한 경험으로 다진 기질 때문인지 조선왕조시대에 목숨을 걸고 조직의 역할에 충실한 관리들이 적지 않았다.

인조시대 사관은 1635년 7월29일 실록에서 “인조는 요순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그는 인조가 “백성들을 굶어죽게 하면 이를 큰 벌로 다스릴 것이다”고 말했지만 정작 구체적인 정책이나 대안은 제시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입으로만 하는 정치였다고 평한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 낸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에 책봉된 가평군수 유백준은 “국가의 흥망은 전적으로 군덕의 잘잘못에 있다. 인심이 흉흉하고, 뇌물 꾸러미가 조정에 횡행하고 있다.

국가의 위험이 마치 끊어지려는 실끈과 같은데 광해가 죽기 전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다(인조실록 1630년 3월26일)”면서 인조에게 직설적 상소를 보냈다.

한마디로 하급관리가 무소불위 왕을 향해 “인조 당신보다 차라리 쫓아낸 광해가 더 낫다”고 말한 것이다. 기개가 대단한 인물임을 엿보게 한다.

어느 조직이든 신입과 고참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 오랜 전통에 따라 독특한 관행들이 통과의례처럼 시행되고 있다는 게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런 관행들이 구성원들 간에 결속력과 충성심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진행행태 만큼은 예전의 엽기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절제 있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직보다 개인이, 그리고 안전이 더 중시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석 기자  arguskim@outlook.kr

<저작권자 © 여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현석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