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번 여름은 어떻게 명명할 수 있는가? <내가 훔친 여름> 대신 ‘내가 살아낸 여름’, ‘내가 노래한 여름’, ‘내가 되찾은 여름’, ‘내가 행복한 여름’, ‘내가 채운 여름’....... 제목 붙이기만으로도 벌써 지나온 여름이 아련해지기도 할 것이다. 김승옥은 어떻게, 무엇 때문에 여름을 훔쳤다고 하는 것일까?

1941년생으로 순천에서 성장했던 김승옥 작가는 지금도 순천만 생태공원 옆 쪽 순천만 문학관 내 김승옥관에 직접 찾아와 머물다 가곤 한다. <무진기행>이란 작품으로 문학사에 뚜렷한 위상을 남긴 김승옥은 ‘4.19 세대 작가’이라 명명된 1960년대를 대표한 작가이다.

미완의 4.19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입학해서, 1962년 대학 재학 시절 <생명연습>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당시 작가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받으며 천재 작가라고 불렸을 만큼 필력을 발휘했다.

<내가 훔친 여름>은 1967년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것을 묶은 중편소설이다. 이야기는 서울대학교를  휴학한 채 고향 무진(순천)으로 내려와 있는 이창수에게 중학교 동창 장영일이 서울대학교 뱃지를 달고 무전여행자의 꼴로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둘은 함께 땡전 한 푼 없이 기차를 타고 여수를 향하고 기차 안에서 두 명의 여인과 만나며, 이 만남은 여수에서의 동선을 따라 다시 이어진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남형진과 카바레를 리모델링하려는 주인 강동우와 그의 가족과 인연을 맺고, 여수의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 초대되기도 한다. 이 만남과 관계들 속에서 두 젊은이들은 치기와 일종의 사기행각을 부리게 되는, 청춘들의 한여름 모험과도 같은 이야기이다. 아니 모험이라기보다는 영혼을 마주보고자 앓는 열병치레라고 하겠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후 식민 통치의 잔재와 전쟁의 상처, 나아가 여전한 군주적 지도자의 독재로 실존의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 1960년대에 이르러 4.19혁명을 분기점으로 진정한 시민사회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 체제 속에 5.16군사정변을 맞이하면서 혁명적인 대결의 대상이 무화되기 시작한다. 독재와 빈곤이라는 혁명의 대결 대상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인정받은 박정희 군사정권과 이들이 내세운 경제발전을 앞세운 조국의 근대화는 표면적으로 그 이전의 악이나, 적과는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장세운 채 생사여탈권을 발휘하고, 산업 노동력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생명권력이 작동하는 사회이자, 삶의 질 향상이라는 명분으로 문화를 통한 규율화를 통해 규율권력을 내재화하기를 요구하는 사회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은 이 생명권력과 규율권력의 힘 앞에서 당장의 저항을 표면화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국가적 거대담론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며, 일련의 것들은 개인의 개별적인 요소와 상관없이 동일성의 폭력으로 작동하면서 규율화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자발적 적응만을 요구하는 당위와 문화의 이름으로 이행되는 동일성의 폭력에 대적할만한 배짱도 없다.

김승옥 문학은 이 힘없는 사유자, 젊은 지식인들의 한 표상이다. 분명 억압과 불합리함이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이지만 공격해야 할 적이 비가시화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이들이 할 수 있는 것, 특히 김승옥 소설의 인물들이 보이는 저항은 세 가지 양상을 띤다고 본다.

그 첫 번째가 감수성의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다. 김승옥의 문학을 일컬어 ‘감수성의 혁명’이라고 평해지는데 동일화의 폭력에 포섭되지 않을 내면으로의 집중과 고백을 통해 개별자로 남으려 한다. 두 번째는 인물들의 위선적이거나 악의 있는 행동을 보여주는 위악성과 세 번째는 이곳 아니면 저곳이라는 이원론적인 사유에서 벗어나 늘 고정되지 않은 채 사이에 존재하고자 하는 노마드적 사유라 할 수 있다.

<내가 훔친 여름>에도 이 세 가지 김승옥 문학의 매력적 요소들이 내재하고 있으나 특히 위악적인 인물들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자신들을 서울대학생이라고 속이고, 미술학도라고 속이고, 사랑을 속이는 등의 위악적 태도는 어떤 문학적 대항 담론으로 의미 지워질 수 있을까? 인물들은 삶의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는 방식의 1960년대 통치술을 분명이 꿰뚫어보지 못한 채 상처들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김승옥은 당시의 대다수가 원한다고 여겨지는 보편적 기준에서 애써 눈을 돌리려 하고, 이에 어긋나는 행동들을 자행하면서 저항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사회적 경제적 위계에서 일탈한 인물들로 생명정치에서 자발적 배제를 선택한다. 위악적인 행동들이 저항담론이 될 수 있는지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당시를 살아낸 작가 김승옥이 보여준 문학과 그 인물들의 행동은 획일화와 자동화의 속도를 줄이고, 사유의 장으로 이끌기 위한 실천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작품 후반부에 여수지역 발전을 위한 집회 장면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현실의 문제 해결과 이상의 제시라는 문제를 두고 재력가 강영우와 가짜 대학생 장영일이 설전을 벌이는 장면은 당시 지식인들의 고민을 잘 담아내고 있다.

“여수가 어떻게 발전하면 좋겠는가?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토론이 일어난다. 이때 강영우는 앞날의 여수를 공상해보자며 “오동도에서 남해까지 가교가 놓아진 여수” 등을 꿈꿔보자고 제안한다. 이에 장영일은 “실현성이 없는 공상이나 지껄이면서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문제를 끌어내어 이야기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스피노자는 희망이나 용기를 믿지 않았다. 일체의 슬픈 정념들을 가치 절하한 스피노자에게 ‘희망’이나 ‘안정’이 의미 없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내부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작용하는 부정적인 것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희망’은 자신에 대한 증오, 죄의식, 후회, 수치와 같은 슬픔의 씨앗을 품고 있다.

발전에 대한 희망적 공상 역시 현재를 무시하고, 지금의 필요성을 유보한 채 감내해야 할 무언인가 부정적인 정념을 제공한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의 경제발전 담론으로 유보되어야 했던 자유의 문제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부분이다.

그럼 <내가 훔친 여름>의 실체에 대해 언급해 보자. ‘여름’ 그 뜨겁고 어쩔 수 없는 정념 덩어리는 기차에서 만난 영화배우 신성일을 사랑해서 상경했다 붙잡혀 내려온 여인으로 대변된다. “나는 이제부터 그 여자에게서 뜨거운 태양을, 기름처럼 무겁고 번쩍이는 맑은 파도를, 숨찬 갯바람을, 여름을 짜낼 작정인 것이다. 마치 레몬을 짜듯이 짜낼 작정인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창수가 이 여인에게 기대한 것은 그녀의 감수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가 사랑한 신성일이 나온 영화의 모방만을 할 수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감성마저 획일화시키는 사회를 드러내 버린 것이다. 소중히 간직할 감수성이 아니라 문화라는 이름으로 보급된 분할해야 할 감성일 뿐이니 훔쳐버려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젊은 그들은 감수성 뿐 아니라 영혼을 마주하기를 바라지만, 그 영혼을 마주하게 하는 질병, 암이라도 앓고 싶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술을 마시고 토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영혼이란 건 참 우스운 물건이어서, …… 평소에는 어디 가 있는지 숨어 있다가 꼭 어디가 아파야 나타난단 말야. ……  요컨대, 병이란 그렇게도 좋은 거야. 난 많은 병에 걸리고 싶어. 이번 여름엔 적어도 다섯 가지 이상 병에 걸려보고 싶어. 그럴 계획이야.” (p.31)

다가오는 가을 우리가 훔쳐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지, 그리고 죽을 만큼 앓아내고서라도 마주할 영혼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 생각해 본다.

※ 지역을 배경으로 하거나 지역 출신 작가들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글을 연재합니다.

데스크  yeosune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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