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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자살과 김승옥의 생활인으로 살아남기송은정 (순천대학교)

문학칼럼2> 김승옥 소설 <환상수첩> 

소낙비 - 마광수

소낙비 소리는 / 물이 자살하는 소리 // 나도 소낙비 속으로 뛰어들어 / 같이 자살하고 싶다
(시집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 에서)

지난 9월 5일 마광수 작가는 자신의 시에서 소망한대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을 접한 나의 친구는 그가 외로운 삶을 살다가서 슬프다고 했다. 우리는 그가 선택한 자살이 과연 주도적인 선택일까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의 문학이 겪은 편파적인 시선과 교수로서의 권위를 요하는 생활계 안에서 겪은 내몰림과 외로움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떠밀림은 아니었을까 라고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가 확신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 앞에서 스스로 마감을 선택했다는 것도 그의 확신일 것이라고 했으며, 인간에겐 본래 내재적인 생명력인 에로스의 욕망과 죽음을 향한 타나토스의 욕망이 공존하니, 그의 죽음의 선취는 역시 주도적 결정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 그 친구는 후회했을까? 라고 물었다. 마광수는 <내가 쓸 자서전에는>이란 시에서 

(전략) 내가 쓸 자서전에는 / 나의 글쓰기는 이랬어야 했다고 / 후회하는 장면이 담겨 있을 것이다 // 우선 손톱 긴 여자가 좋다고 /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 그리고 야한 여자들은 / 못 배운 여자들이거나 방탕 끝의 자살로 / 생을 마감하는 여자여야 했다고 // 그리고 무엇보다도 / 사라는 즐겁지 않았어야 했다고 / 권선징악으로 끝을 맺는 / 소설 속 여자여야 했다고 // 나의 고된 삶 속에서 / 그나마 한 줌 상상적 휴식이 되어주었던 / 그녀와 나의 잠자리가 / 타락이었다고 그래서 반성한다고 // 라는 내용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의 시는 역설적으로 그딴 식으로 후회하라고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만을 말할 뿐이니까.

故마광수 작가는 이성으로 통제되는 세상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억압되고 있는 감성의 영역에서의 환상과 황홀을 가시화하려던 작가이다. 마광수에게 참된 작가는 ‘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지, ‘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문학은 탐미적 일탈(逸脫)이다>). 그러나 그는 그 꿈들로 그의 작품이 그랬듯이 이성과 권력의 정치적 구도 속에서 작가로, 대학교수라는 생활인으로 견뎌내는 것이 쉽지 않았던 듯하다.

자살을 선택한 사람을 비판할 때 적절한 근거로 ‘생활’이라는 막중한 책임과 무게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야 한다는 문제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더구나 그를 자살로 이끈 고뇌라는 게 그처럼 횡설수설하고 유치한 것이라면 아예 세상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리라.” (김승옥 <환상수첩>, P.96)라는 김승옥 소설 속 한 인물의 말이 합당할 때도 있을 테니까.

김승옥의 소설 <환상수첩>(1962)은 액자소설 형태라 할 수 있는데, 살아남아야 한다고 강렬하게 주장하는 한 살아남은 자가 ‘생활인으로 살아내기’위해 무진 고뇌하다가 결국 자살해버린 자의 수기를 그대로 옮겨 발표한 형태로 구성된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살을 선택한 인물이 끊임없이 고뇌했던 것은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 수기의 화자인 정우는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다가 애인인 여대생 선애의 자살 이후 하향하여 고향 순천으로 내려온다. 서울에서의 삶은 ‘우기의 기상처럼 위악의 구름이 뭉게뭉게 이는 우리의 생활’이라고 표현된다. 정우는 생활인으로 살아내기만을 규율화하는 힘의 논리에 염증을 느낀다. 특히 그 자신 역시 선애에 대한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랑과 성욕, 삶에 대해 연민을 갖는 마음이 오히려 타락한 것인지 모른다고 한다. 자살한 선애는 살아가다 어느 날 맞닥뜨린 무서움과 쾌락이나 위선들을 경험했음에도 그대로 똑같이 살아낼 수 있느냐고 묻는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버렸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별수 없이 눈에 보이는 구멍이고, 찬바람이 술술 새어오는 구멍인데 그 구멍을 안고 예전처럼 그대로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 구멍을 보고 고뇌하며 살기 보다는 속물이 되거나 그것을 아예 볼 수 없는 백치로 견뎌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죽지 않고 어떻게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하던 물음을 어쩌면 영원한 질문, 두고두고 써야 할 테마(<환상수첩> p.70)라고 했던 정우는 고향 순천에서도 답을 찾지 못한다. 그러다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윤수라는 친구와 여수로 여행을 오고, 해단(解團)을 앞두고 마지막

공연을 떠나는 곡마단을 따라 거문도로 향한다. 거문도에서 정우는 한 순간 생활인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윤수가 하룻밤 만에 결혼하기로 결정한 곡마단의 ‘미아’라는 여인의 줄타기와 30여 년 간 곡마단 생활을 한 ‘이씨’의 곡예에서 슬프도록 서먹서먹하면서도 존경의 감정을 갖게 하는 생활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우가 그토록 “무서워하며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던 생활인의 삶”이 이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어떤 위악이나 위선도 없는 실상은 아주 간단한 모습을 한 하나의 얼굴”(<환상수첩> p.86~87)임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곧 그 존경스러운 담백한 생활인의 모습은 불가능하다고 판명된다. 공연 마지막 날 이씨는 곡예 도중 추락사하고, 순천으로 돌아온 순수한 사랑을 키우려던 윤수는 비열한 이들을 상대로 무모한 정의를 시도하다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우는 “지상에 죄가 있을 리 없다. 있는 것은 벌뿐이다. 벌은 무섭지 않다. 무서운 것은 죄다. 라고 떠들며 실상은 벌을 피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던 어리석은 나였다”(<환상수첩> p.94)고 회고한다. 살아낸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치러야 할 벌을 수행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떳떳한 무죄의 삶을 살면서도, 존재함만으로 받아야 하는 벌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 작가나 지금의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있는 살아있음의 벌을 두려워하는 무의식은 자본의 논리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지배로 인함이다. 생활인으로 살아내야 함은 정신과 몸, 이성과 감성이 어우러지며 행복해지는 과정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권력은 투명해야 할 이성의 힘을 권력의 시녀로 전락시키고, 불투명한 환상의 장막 안에서 황홀해야 할 몸은 금기시하거나 성(性)상품화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압박한다. 권력은 욕망이나 문화의 형태로 우리의 무의식에 작동하여, 정신과 신체를 장악하기에 우리의 무의식의 근원에는 두려움과 소외에 대한 불안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가.

자살은 어쩌면 이런 예속화에 대한 근원적 저항일 것이다. 정신과 신체를 장악하고자 하는 권력에 맞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애 쓰다가 애쓰다가 안 되면, 아니 그렇지만 기어코 해내어야만 되었다.”(<환상수첩> p.71)고 다짐을 하고, 혹자는 “너의 이른바 고뇌라는 것에서는 젖비린내가 난다”(<환상수첩> p.71)고 비웃는 것을 알지만 예민한 이들에게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에 부응하며 살아내야 하는 생활인의 삶이란 오욕의 삶일 뿐인 것이다. 죄를 짓는 삶 말이다.
 
“아무런 속박도 욕망도 없이 볼을 스치고 가는 바람의 온도와 체온과의 장난을 즐기며 꾸부린 자세가 오히려 편안하다고 느끼며 그리고 내 구두가 아스팔트를 울리는 소리만을 들으며 어디론가 그저 걸어가는 일. 그 순간에 나는 죽어도 좋았다.” <환상수첩>에서 자살한 정우가 여수 바닷가를 걸으며 하던 생각이다. 그의 이런 생각이 환상일까? 아니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생활인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던 그의 고뇌들이 환상일까? 그도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바라본 자살해 버린, 실패한 생활인들의 삶 자체가 한낱 환상일 뿐이라는 것일까? 아니 반대로 죄를 짓더라도 살아내야 한다고 믿는 것이 환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는 그 환상에 대한 욕구 또한 존재해야 살아낼 수 있다. 모든 것이 투명하고 분명하며, 구획되도록 하기 위해 지금도 인간은 스스로 수없이 많은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 환상들이 물신화되고, 상품화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문학은 우리에게 환상을 가로지르도록, 그리고 우리가 다시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감지하도록 해준다.

데스크  yeosune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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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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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창우 2017-09-19 12:50:28

    우리의 삶이 죄를 짓는 것일지라도 그 삶은 값진 것일 겁니다.
    그런 우리의 삶이 금기를 깨뜨림으로 하나의 제의형식을 빌어 신의 모습에 다가가는 완전함을 추구할 것이니 말입니다.
    다시한번 삶의 의미를 셈해보며 뒤돌아보고 갑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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