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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답사기> "학살을 수단으로 하는 자는 용서할 수 없어"'대전 양심과 인권나무' 이병구 사무처장

지난 16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소설 태백산맥과 함께 하는역사인권기행(여수,순천,벌교)에 나선 '대전 양심과 인권나무' 16명이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저자 주철희 박사와 함께 여순항쟁 답사를 마쳤다. 주박사는 16일 오전 답사에 앞서 여순항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한 강의를 통해 '반란'이 아니라 '항쟁'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다음 글은 양심과 인권 나무 이병구 사무처장의 답사기이다. <편집자 주>

히틀러는 유대민족 등 타 민족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것으로 자기정치의 목적을 달성해 나갔다. 이승만이는 자기 민족을 1백만 학살하는 것으로 권력욕을 충족해 나갔다.

여수항쟁 전적지 기행은 전적으로 최근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를 출판하는 등 온 생을 여순항쟁 진실규명을 위해 바치고 있는 주철희 선생님에 빚진다. 11월의 사전답사 때부터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시기 위해 열정을 보인 모습대로 이번에도 선생님의 강연과 공식 일정이 끝나고도 밤늦게까지 숙소까지 오셔서 남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모습 속에서 우리 지역의 또한 사람이 생각났다. 동구 산내 골령골의 학살을 세상에 알린 오마이뉴스 ‘심규상’기자님이 생각났다.

광주항쟁 당시 군대는 광주민중들의 학살을 거부하지 못했다. 70년 전 여수의 14연대는 제주민중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주철희 선생님의 지적대로 ‘반란’이라면 서울점령 계획과 성공 후 지도부 구성, 전국적 규모의 군사력과 지휘부 등을 충족해야 한다. 하지만 14연대의 봉기는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한다.

오로지 제주민중 학살을 거부하고, 지리산으로 피해 들어가 이승만하고 싸워야겠다는 대충의 목표만 가지고 있다. 기행 길도 14연대가 자리했던 14연대 병영과 여수역(순천 거쳐 구례역에서 내려 지리산으로 가기 위한 최단 경로)으로 향해 간 봉기군을 따라 움직였다.

항쟁 초기부터 조작사건 혁명의용군 건과 연결 지어 반란으로 성격규정을 하려는 이승만의 노력은 집요했다. 하지만 우익까지 얽어 넣으려 했던 시도가 여의치 않자, 여순항쟁은 갑자기 지방좌익+일부 총 든 군인의 반란 시도로 성격 규정된다.

그리고 처절한 학살만행이 곳곳에 벌어진다. 관동군에서 독립군을 잡아 죽이던 5연대 1대대장인 김종원이는 종산국민학교에 여수시민들을 잡아다가 우익청년들에 의해 손가락으로 지목받은 사람들을 일본도로 목을 쳐 죽이는 학살만행을 자행한다. 여순항쟁 당시 여수 인구 30만, 여수 순천 등지에서 학살로 죽은 사람들이 총 1만 여명에 이른다.

봉기 진압 후 14연대 봉기 사건은 철저하게 반공문화를 조성하고,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사건과 발생원인과 전개과정 그 주체 세력 및 피해 상황 및 가해 주체 등을 뒤집어 놓은 작업을 다진다. 문인들과 종교위문단 등은 보고서 및 각종 문학작품과 연극 등을 통해 봉기를 왜곡한다.

만성리의 학살지에 형제묘가 있다. 125명을 엉성한 군법재판으로 총살형에 처하고 장작사이에 시체를 넣어 화장을 하고 한구덩이에 집어넣는다. 항쟁 후 빨갱이로 지목받아 온갖 불이익을 당해 온 후손은 결국 형제묘의 희생자 명단이 새겨져 있는 묘비 뒤쪽 면을 판석으로 땜질 해 자기 부친의 이름을 가려 버린다. 느낌표 몇 개로 막음한 만성리 추모비와 땜질로 가린 형제묘의 뒷부분은 여순14연대 봉기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기행의 부제는 “산내 골령골에 끌려 온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다. 1948년 10월의 봉기 진압 직후 학살당한 사람들 외에 비교적 가담 정도가 미미한 사람들은,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대거 대전교도소로 이감해 와 형을 살다 1950년 6월 28일부터 3일간 산내 골령골에서 전부 학살당한다. 한국전쟁 당시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끔찍한 보복학살이 시작되는 사건이 산내로부터 시작된다.

좌던 우던 학살을 정치수단으로 삼는 것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인류역사가 승자들의 기록으로 점철되면서 전쟁승자에 대한 기록은 있어도, 학살 만행자들에 대한 기록은 모호하게 처리되어 왔다.

20세기 대학살전쟁인 양차 대전을 겪고 나서야 집단학살을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엄정하게 처벌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근대와 현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이 학살자들에 대한 처벌과 기록을 엄정하게 남기는 가에 달려있다.

이승만 같이 제주4.3항쟁 당시 민간인 대학살, 보도연맹 학살, 서울 회복 이후 경미하거나 확인되지 되지 않은 부역자 대학살, 거창 학살 등 지리산 주변의 산촌민들에 대한 학살 행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끔찍한 저지른 자를 ‘국부’ 라는 등 돼먹지 않는 수사를 써가며 숭배하는 자들은, 히틀러를 독일민족을 대공황에서 구해내고 독일을 세계의 으뜸가는 국가로 선양한 지도자로 보고 숭배하는 네오나치들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인권기행을 통해서 가장 초보적인 합의부터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함을 알겠다. 어느 누구 던 어느 세력이든 학살을 수단으로 하는 자들을 용납 할 수 없다.

데스크  yeosune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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