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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소망의 힘 이청준 <비화밀교(秘火密敎)>송은정 (순천대학교 외래교수)

제야의 종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 끝과 시작이 만나는 순간은 진정 지난 한해의 나와 세상을 용서하는 자리였으며, 다가온 새해에 대한 희망을 길어 올리는 샘터였는지 궁금하다. 용서와 소망은 여느 종교나 그 교리의 한 덕목으로 기리고 있는 요소들이고 보면, 제야의 그 순간은 어쩌면 누구나 신앙을 품는 때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청준의 1985년 작 <비화밀교(秘火密敎)>에는 이 제야의 순간에 산 정상에서 비밀스런 종교 의식과 같은 불의 제전이 행해진다.

소설은 J읍의 제왕산을 배경으로 하는데 작가 이청준의 고향인 장흥의 제암산이나 억불산 혹은 천관산을 떠올리게 한다. 한 해의 마지막 날 J읍 출신 소설가 ‘정훈’(이청준은 소설 속에 소설가 자신의 분신에 ‘정훈’ 이란 이름을 부여하곤 한다.)이 동향 선배이자 민속학자인 ‘조선생’과 제왕산 밤 산행에 나선다.

그 밤의 산행에 대한 내막을 전혀 모르는 나 ‘정훈’에게 ‘조선생’은 산을 오르며 그 지역 사람들이 밀교처럼 행해온 일에 대해 알려준다. 조선생은 자신이 겪은 40여 년 전의 기억에서 부터 그보다 훨씬 오래된, 어쩌면 동학군의 마지막 저항지이었던 장흥이라는 점에 미루어 동학에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을 만큼 긴 비사(秘史)이자 밀교인 이름 지을 수 없는 제의를 설명한다.

일 년에 단 하루, 제왕산에 모인 사람들은 모든 관계의 허울들을 벗고 모두가 대등한 인간으로 만나 손에 횃불을 들고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눈다. 일제의 앞잡이와 독립군도, 이념의 적이든, 서로의 원수이든 그 어떤 것도 상관하지 않는다. 모두를 용서하는 것이다.

12시를 2시간여 앞두고 1년여 동안 불씨를 지켜온 종화주가 불씨를 나눠주면 12시까지 이런 횃불의 인사가 이어지고, 12시 이후 가장 늦게까지 횃불을 지킨 이가 다음 해까지 불씨를 지킬 종화주가 되어 산을 내려가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요한 화두는 이 밀교의 제의 자체 보다 ‘나’가 이 밀교를 증언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생이 ‘나’를 제의의 현장에 데려온 것은 바로 이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오랜 동안 유지된 비밀스런 일이니 노출되면 안 되는 것임에도, 사실의 기술이 아닌 사실의 암시와 증거를 통해 세상에는 우리가 미처 감득하지 못한 어떤 커다란 힘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그 깊은 소망의 샘물이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조금씩 조금씩 깊은 곳으로 스며 흘러내려오고 있었듯이 세상 사람들에게 숨어 흐르는 힘의 존재를 알리려는 것, 세상의 보이지 않는 뒷겹을 알리려는 것이 조선생의 의도인 것이다. 

지난 글 <현장사정>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이청준 소설의 진술 불가능한 것을 진술해야 한다는 작가의 소명과 연결된다. 두 소설 모두, 분명 이야기해야 하거나 노래할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시적 힘을 지니게 되면 왜곡되고 변질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작가 이청준이 갖고 있는 딜레마이다. 

우리 누구나가 감지하고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 현상 질서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현실에 대한 지배의 질서로서 작용하는 것이지. 그런데 그 음지의 힘에다 어떤 가시적 질서를 부여하여 그것을 논리화하고 증거 해 보이면 그 순간에 그것은 현상의 세계로 떠올라와 그 가시적 현상 세계의 지배의 질서 혹은 지배의 논리로 합세해 버리거든.

드러나려는 것, 그래서 지배하려는 것, 그것이 사실은 이 세상 모든 힘의 본능적 속성이기도 하지만 말일세.

그래 어떻게 보면 그 음지의 질서라는 것도 사실은 드러나기 위한 싸움, 혹은 드러나 싸우려는 자기 실현욕과 충동에 그 힘이 근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이나 지금 이 세계의 균형을 위해선 전혀 바람직스런 일이 아니지.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이나 이 세계는 논리와 논리 아니니 것, 혹은 일상의 삶의 덕목으로 선택된 질서와 그것이 아닌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실체와 그림자 그런 두 겹의 힘의 질서로 이루어져 나간다는 게 나의 인식이니까. 현상의 세계와 소망의 세계의 관계라고 할까.

소설 속에서는 이것을 조선생의 ‘정신주의’라고 말한다. 작가 이청준의 철학적 고민이기도 할 것이다. 드러내고 증거 해야 할 것들이 있지만 그것이 힘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현장 사정에 따라 노래가 노래일 수 없게 되듯이, 소망한 것들이 실체가 될 때 지배 논리에 합세해 버릴 수 있다는 우려감과 소망의 숨은 물길은 잘 간직하되 관수로를 내어 물길을 마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이 이 소설의 주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망의 불길이 모이면 폭발하기 마련이다. 솟구칠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지게 되는 폭력성을 우려하지만 결국 증거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솟구침밖에 없다. 아기장수의 비밀이 알려져 비극이 되어야만 그 신화가 완성되듯이 말이다. 이청준은 작가는 그 폭발에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자체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와 질서와 운명을 증거하기 마련인 소망들에 말이다.
 

2018년 올 한해는 우리의 소망이 힘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온전히 그 자체의 간절함으로 증거될 수 있기를.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서로를 용서하며 껴안는 가운데 흘러넘쳐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데스크  yeosune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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