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정 ( 순천대학교 외래교수)

“혀를 맞물고 사는 만큼 뜨거운 속을 다 내주더라도, 여자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느니라. 세상을 살다가 보면은 별별 일이 다 있다. 혼자 있을 때 찾아온 남편 친구가 갑자기 손목을 잡는 경우도 있고, 이웃집 머슴이 순간적으로 눈이 뒤집혀 물 한 그릇을 청하고 들이닥치는 경우도 있단다. 길을 가다가 호젓한 데서 마주친 낯선 남자가 문득 짐승으로 변해서 덤벼드는 경우도 있고…… 그런디, 소갈머리 없는 여편네들은 그게 자랑이라도 되는 양 제 남편한테 쫑알거리는 수가 있다.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살인사건 백이면은 아흔아홉은 꼭 여자가 가운데 끼이는 법이다. 살인사건까지는 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말을 쫑알거리는 여편네는 평생 동안 제 남편한테 의심을 면하고 살 수가 없게 된다. 잘못하면 의처증까지 생긴다. 그러면 두들겨 패. 그런께 여자는 먼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제 몸을 조심해야 하고, 그런 일을 설사 당했다고 하더라도 속으로 썩이고 입을 잘 호라메우고 살아야 쓴다…….”

시집오기 전에 어머니가 이르던 말을 생각하며 현순은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한국소설문학대계 59, 한승원, 󰡔해변의 길손 外󰡕 , 247~248면)

소설 속에서 확인되는 성적인 폭력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 소설이 발표된 1989년이면 30여 년 전의 표현인데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어쩌면 여성들은 성적인 폭력을 당하고도 함구의 계율을 암묵적 혹은 공공연하게 강요당해왔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요즘 불고 있는 ‘미투운동’에 피해 여성들이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장흥 출신인 작가 한승원의 소설에는 남녀 인물 사이의 성적인 긴장감이 다양한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 소설 「폐촌」의 주인공인 ‘밴강쉬’와 ‘미륵네’를 비롯해 「낙지 같은 여자」, 「해신」등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은 욕망과 권력의 주체이자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의 소설에는 남도 갯가 사람들의 말투 그대로에 삶의 구체성이 실리고,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실상이 인물들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아프거나 불편한 리얼리티를 확보한다. 특히 좌우 이념 갈등 속에서 공동체가 겪는 살인과 죽음, 전쟁 그 이후 서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애증과 원한관계 등이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그 부조리한 역사적 비극 앞에서 갯가 사람들은 모두가 피해자인데, 그 와중에 여성은 이중의 폭력을 겪는다. 국가나 이념이라는 거대 담론에서 피해 입은 마을 사람들, 남성들이 분출하는 원망과 분노의 표적이 되어 이들의 폭력에 다시 노출되기 때문이다. 일부 논문들에서는 이러한 피해자들의 응어리진 갈등을 풀어내게 해주는 출구 역할을 하는 여성 인물은 생명력으로 상처받은 이를 포용하고 용서하는 모성의 상징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소개한 작품 「굴」에서 서술자인 해순을 겁탈한 금식이라는 인물 역시 가해자이지만 누구보다 아픈 상처를 받은 피해자이기도 하다. 해순의 아버지는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반동분자로 몰려 인민재판에서 처형을 당했기 때문에 경찰이 다시 들어온 이후 해순의 집안사람들은 누구보다 당당해질 수 있었다. 반면 해순이 태어나기 전 해순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고, 14연대 반란군을 도운 이를 아버지로 둔 유월과 금식은 일부 마을 사람들의 미움과 폭력의 대상이 된다. 거지로 떠돌다 해순 어머니의 도움으로 해순네 집 몸종과 머슴으로 들어온 유월과 금식은 10대인 주인집 아들과 딸인 해순과 해순의 오빠에게 핍박당한다. 유월은 수차례 해순의 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금식 역시 해순을 비롯한 마을 아이들의 조롱과 학대를 견뎌내야 했다. 10대의 해순은 죄책감 없이 증오와 미움이 가득 찬 마음으로 유월의 성폭력을 방조하거나 돕기까지 했다. 이후 해순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금식에게 겁탈을 당했다. 그런데 해순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두 남매에게만 비밀 편지를 남겼는데 그 편지에는 유월과 금식이 그들과 배다른 형제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한승원 소설 「굴」은 인간의 위악성, 내면의 미움과 원망이 자아내는 폭력성이 결국 스스로에게 되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폭력과 혁명과 사랑의 공통점은 상대에게 깊숙이 개입하여 변화시키는, 기투 즉 몸을 던지는 강한 접촉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승원의 소설 속 남녀의 폭력적인 모습은 어쩌면 여기서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서로에게 기투하며 연대감을 느끼는 것일 터이나 미처 그 소통과 화해의 과정과 방식이 세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원초적인 폭력의 방식만을 되풀이 하는 것 말이다. 폭력의 방식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이어서 상대에게 개입하는 것이 손쉽게 성사될 수 있지만, 사랑의 방식은 많은 준비와 소통의 시간, 희생 등을 요구하기에 훨씬 더 더디게 느껴질 것이다.

단편 「굴」에서 묘사되는 시간과 공간 표현의 생생함은 독자들이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한 한승원의 필력을 느끼게 한다. 이런 아버지의 필력을 이어받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소설가 한강(48세)이 2016년 「채식주의자」로 영미권 최고 권위의 문학상 맨부커 상을 받은데 이어 올해 다시 한 번 「흰」이라는 소설로 맨부커상 후보에 올라 관심을 받고 있다. 소설 「흰」은 하얀색과 연관된 사물이나 현상을 소재로 한 옴니버스 식의 소설로 마치 시나 수필인가 하는 착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흰」에서도 그렇지만 한강의 소설에는 상처받은 여성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부분이 많다. 아버지와 딸이 각각의 작품 속에서 그려낸 폭력과 상처에 노출된 약자와 여성의 모습이 생생하게 와 닿게 한다.

문학은 가끔 위로해 주기 보다는 상처를 헤집어 보여주며 똑바로 보라고 요구한다. 미투 운동도 지금은 곪은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작업부터 시작하고 있는 과정일 것이다. (2018.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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