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송은정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10․19사건을 그 시절, 그 곳에서 체험한 이가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생생하게 살려 낸 소설이 있다. 여류작가 전병순이 24살의 나이로 여수여중에 교사로 재직하는 중 경험한 여순 사건을 소설화한 『절망 뒤에 오는 것』이다. 전병순(田炳淳)(1929~2005)의 데뷔작이기도 한 장편소설 『절망 뒤에 오는 것』은 1961년『한국일보』가 모집한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입선된 소설이다. 1962년 3월 6일부터 10월 19일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된 뒤 1963년에 국제문화사(國際文化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작품은 작가가 대학시절 휴학을 하고 여수여중 교사로 재직하던 중 여순사건을 직접 체험한 것을 토대로 썼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나아가 여순10․19에서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 민족 분단의 비극을 구체적인 인물들이 삶을 통해 잘 그려내면서, 섬세한 연애감정을 한 축으로 형성해 이야기를 전해하면서 애정의 윤리도 생각해 보게 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특히 금기시되던 지역의 역사를 여성의 섬세함을 살리면서 거대서사와 미시서사의 접점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민족사의 격동기 속에서 삶과 사랑과 민족의 분열, 사상의 갈등을 끈기 있게 추구한 작품으로 여성적 섬세성이 신문소설의 제약성을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고 볼 수 있는 이 작품이다"는 평을 받으면서, 전병순은 1962년 여류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가 전병순은 1929년 2월 7일 광주에서 출생했으며 1950년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광주사범학교, 장성중학교, 서울 상명여고 등에서 10여 년 간 교편을 잡았다. 장편소설 <또 하나의 고독>으로 1968년 제5회 여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주로 장편소설을 써왔는데 <현부인>(1965) <독신녀>(1966) <또 하나의 고독>(1967) <안개부인>(1968) 등 1960~70년대에 수많은 화제작들을 발표하였다. 신성일 엄앵란 주연으로 영화화된 <독신녀>나 <현부인>같은 작품은 뒤늦게 1970년대 말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소설 『절망 뒤에 오는 것』의 서술자는 여수여중 영어선생인 여교사 강서경이다. 동료 교사이자 그녀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원동휘와 원동휘를 먼저 알고 사랑했던 동료교사 혜련이 주된 인물로 등장한다. 원동휘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는 오해를 받으면서 진압 군인을 피해 도망치다 붙잡힌 인물이다. 혜련을 먼저 알았지만 이후 강서경에게 마음을 주었다. 이 세 인물을 둘러싸고 진압 군인으로 강서경을 좋아하고 나중에 그녀와 결혼하는 '고릴라'라 불리는 임중령과 여중생 옥자를 육체적으로 점령한 한소위, 말없이 도움이 되어주는 이중위 등 당시 여수여중에 사건진압을 위해 주둔한 군인들이 등장한다. 또한 섬지역에 살면서 학교 근처에 하숙을 하거나 기숙사에 머물렀던 여학생들, 경찰이나 14연대 군인의 가족들로 몰래 몸을 숨겨야했던 학생들 등 당시를 대표할 수 있는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여순사건과 관련한 많은 증언들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듯이 당시 경찰과 진압군인들에 의한 폭력은 이 작품에서도 생생하게 표현된다.

"그 죽일 놈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등뼈를 만져본다. 부어오른 대목이 손만 닿아도 따끔거린다. 새로운 분노가 솟구쳤다. 그들은 누이도 마누라도 없단 말인가. 그래도 가정에 돌아가면 가족하고는 그대로 정상적인 감정생활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여자의 아들이, 어떤 여자의 남편이, 오빠가 그 따위 행위를 할 수 있었던가. 서경은 새삼 그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지위가 그렇기 때문에 부득이하였다면 더욱 가엾은 사람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각을 통해 그들의 인간성은 내내 파괴되어가는 거라고 생각되었다. (82쪽)

이 같은 폭력에 속수무책인 이들에게 취조관들의 응시와 고문은 계속된다.

"죽여라아! 골수분자들이 맨 앞에서 소리 지르면, 선동에 둥둥 타올라간 군중들이 함께 소리 질렀다. 시체가 첩첩이 쌓여갔다." "더 이상 고문은 몸서리난다. 차라리 내가 진짜 빨갱이였더라면"

학대와 폭력 앞에서도 자기 자신은 끝내 좌익이 될 수 없는 상황, 그렇다고 철저한 우익임을 증명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깊어진다.

"그럼 나는 왜 여태 애매한 회색분자였을까."라는 회의와 함께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인간이 개조! 그렇다. 그 많은 인간의 추악한 본능들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인간의 생태가 바꿔지지 않는 이상 이것보다 더 비약적인 이상의 사회란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라는 것이다.

이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장세운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구조를 세우고 채우고 있는 구성원들, 각각의 개별자들의 인간성의 문제에 대한 어떤 요구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 작품은 스토리를 형성해나가며 미시적 삶의 구체성을 살린 작품으로 위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화두삼아 서사의 깊이를 더 해 가지는 않는다.

제목이 절망 뒤에 오는 것이듯이 여순사건 이후, 한국전쟁과 같은 연이은 절망적 세파에 시달리는 인물들은 그 와중에도 일상을 유지한다. 강서경은 임 중령과 결혼하고, 혜련은 원동휘와 결혼하게 되다. 그러나 원동휘는 강서경을 못잊고 있었고 그녀 또한 점차 마음이 동요되어 남편 몰래 그를 만나고 도와가며 힘겹게 살아간다. 남편마저 부상을 당하게 되면서 강서경은 또 다시 '인생은 이제부터'라며 삶의 결의를 다져가는 것이다.

절망의 고비 고비를 넘고 넘겨서 도달한 것은 결국 또다시 "살아야 한다. 오로지 내 힘으로."라는 삶의 충실성에 대한 요구이다. 거대사의 문제점들, 구조적인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보다 실존주의적인 안간힘으로 작품을 끝맺음하고 있지만 삶 또한 그러한 것일 게다. 폭력적 사건들 속에서 실존을 지속하기 위한 일상의 유지는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948년 24살의 나이에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전병순이 담아낸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에 관한 이야기는 여순 10․19라는 역사의 부재한 미시사를 채우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2018. 9. 27.)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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