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정 (순천대 여순연구소)

이 책이 출간된 지 딱 1년이 되었다. 여순사건 발발 7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관련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 책이 가장 최근작이 될 것이다. 소설 『여수역』은 여수역과 귀환정, 그 인근 종고초등학교, 만성리굴, 만성리 해수욕장, 오동도 등이 이어지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1948년 여순사건을 중심축으로 하여 해방 전후에서부터 현 시점에 이르기까지를 아우른다. 이 작품은 지역의 역사와 구체적으로 말해지지 못하는 개별자들의 미시사를 생생하게 아우르면서, 남도 ‘여수’의 장소성과 로컬리즘을 구현해낸 문학으로 나름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기찻길 너머 푸르고 고요하게 반짝이는 오동도 앞바다와 여수역. 철로변 다닥다닥 낮게 들어서 있던 떡떡굴이라 불리던 귀환정. 여수에서 만성리 해수욕장까지 십리 길 사이에 솟아있는 마래산. 산 위쪽으로는 어린아이들의 무덤이라는 돌무덤 사이 산딸기들이 지천이고, 마래산 아래는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 공명과 함께 찬 기운이 일렁이고 박쥐들마저 날아다니는 곳, 지나다니는 차의 불빛이 아니면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만성리 굴. 그 굴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그 굴을 지날 때마다 너도나도 숙연해져 저마다 손에 돌 하나씩을 챙겨 들고 와 던져두던 형제묘 앞 골. 덕충동 산동네와 수정동 연탄공장. 구봉산 자락에 하나 둘, 몰래 생겼던 주인 없는 무덤들과 국동 새마을동네. 여수여중과 종산국민학교와 서초등학교. 50대 이상의 여수 토박이들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 무릎을 탁탁 치며 “대차나, 그랬지.”하는 이들이 많을 듯하다.

이 소설은 “여순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들의 증언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간한 국가폭력 실태 조사서를 바탕으로 가공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만큼 역사를 피상적인 소재로 가져오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을 통해 구체적이고, 체험적으로 그려낸다. 여수역 앞의 번영 상회에서 연탄을 낱장으로 팔고 되로 개량한 봉지쌀을 팔던 윤호관과 그의 아들 윤훈주의 투시락거리는 투박한 대화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귀환정에서 짧은 바가지 머리에 늘 동생을 업고, 혼자 고무줄을 하던 슬프고 슬픈 가족사를 겪어야만 했던 홍양숙의 사연처럼.

또 적절하게 개입한 화자를 통해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설명을 곁들인다. 이는 내화에 해당하는 70년대 초 여수의 풍경을 열 살이 채 안된 윤훈주의 눈으로 그리는 것 뿐 아니라, 외화에 해당하는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훈주의 서술이나 작가의 다른 방식의 개입으로 정리되어 전달된다. 현재적 상황이 도출되게 된 원인들과 경위를 친절하게 설명하게 된다. 일본인 나까지마 간척지에서 미군정이 관리하는 신한공사 소유가 되기까지, 해방 전후사부터 미군정시기의 쌀 공출의 어려움, 여순사건당시의 인민위원회 등의 역사 등 한국사가 지역사에서 구현되었던 모습을 확인하게 해 준다. 더불어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에 대한 묘사와 구체화가 선명하다. 배경으로 제시된 장소에 얽힌 내력이나, 그와 관련된 옛이야기들, 역사들이 엮어지면서 독자들에게 공간을 재발견하는 즐거움도 제공한다.

“함부로 나서거나, 끼어들거나,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곳이 여수. 여수는 죽음이 산재해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 같은 곳이라 기차바퀴에 엄마와 애기가 깔려 죽었던들, 물에 빠져 죽었던들, 그저 무수한 죽음이라는 연속된 띠에 찍는 점 하나에 불과했다.(28면) 여수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공간에 뒤섞여 있는 것 같아 죽음에 대한 만연된 정서가 짙게 배어 있었다. (29면)”

위와 같은 여수에 대한 반복적인 죽음의 표현들. 어쩌면 종점이라는 여수역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기도 하다. 여수역. 전라선 종점, 아니 또 관점을 바꿔보면 전라선의 시작이기도 하다. 끝이나 시작이라는 것은 어느 한 끄트머리,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다른 곳이라는 뜻이고, 어느 한 편으로는 떠돌다 돌아와 안착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 소설 속 여수역 인근의 공간, 특히 옛 여수역 부근 철로 변에 위치해 있던 귀환정은 일제강점기가 끝나 해방의 기쁨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가진 것 없고, 갈 곳 없던 이들의 거처였다. 또 여순 10·19로 집들이 불타 오갈 데 없던 이들이 겨우 찾아든 곳이었으며, 6·25 난리를 피해 온 몇몇 이들, 그리고 박정희 정권 때 무작정 기차에 실려 내쫓긴 도시 부랑자들이 찾아갈 수밖에 없던 곳이다. 인생이 막다른 길에 도달한 후 길을 찾아 이 곳 저 곳에서 떠돌던 이들이 겨우 안착하는 곳이 바로 이 귀환정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2012여수세계박람회 개최와 함께 깨끗이 사라져버린, 한 때는 300여호가 공중화장실 하나를 같이 사용하며, 다닥다닥 붙은 단칸방들에서 희로애락과 삶의 고비들을 넘기던 곳이다.

그곳은 비단 귀환정 만의 역사가 아니고, 여수 전체의 역사와 민중들의 삶의 비유일 수도 있다. 비참한 부모와 가족의 죽음을 혼자 감당했던 어린 소녀 홍영숙이 그 종착역에서 또 다른 출발을 하였던지 믿기지 않을 만큼 단아한 중년이 되어 나타날 수 있음처럼 그 역사는 다시 또 순환 궤도를 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홍영숙이 장례식장에서 보인 처연한 눈물이다. 고향을 떠났다 조문을 위해 몇 십 년 만에 여수를 찾아온 윤훈주. 초로의 그는 장례식장에서 홍영숙도 만나고 그의 친구들도 만났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여순사건과 관련한 의견들로 대립과 갈등, 나아가 싸움으로까지 번지고 만다. 같은 시기의 같은 역사를 거쳐왔지만 그들에게 아픈 요소들은 각자 다르게 기억되고 있기도 했겠지만, 오랜 이데올로기적 폭력에 의해 반목이 가시지 않았고, 그것이 폭발한 것이다. 그 혼란한 다툼 속에서 겉보기에는 정말 다른 사람인 것처럼, 아무 아픔도 없었던 같이 단아하게 나이든 홍영숙이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드러나지 않고, 내색하지 않는다고, 시간이 지났다고 다 괜찮아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채 삭히고만 있는 이들은 가슴이 어떠할지……. 빗장을 열고 오랫동안 가둬둔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풀어내어 지금이라도 바르게 차곡차곡 정리해 가야 할 것이다. (2018.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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