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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생생합니다 -1<기획연재 - 여순10·19의 기억 1-1 >

* 이번 호부터는 여순사건의 피해자와 그 유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을 연재합니다.

 

작가 송은정 (문학박사,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

구 술 자 : 황순경(1939년생, 81세, 당시 9세) - 現 여수유족회 회장

구술 일시 : 2018년 7월 23일 오후 4시

구술 장소 : 여수지역사회 연구소 사무실

당시 거주지 : 전남 여천군 쌍봉면 여천리 내동부락(현재 여수시 여천동) - 80여 호 세대 중 65호가 황씨 자자일촌(집성촌)

가 족 관 계 : 아버지 황운선(사건 당시 아버지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심), 어머니 우경옥(71세에 별세)의 3남매 중 막내아들. 위로 피해자인 당시 23세인 형 황순헌(순채), 당시 12세인 누나.

 

희 생 자 : 황순경의 형 황순헌(당시 23세, 여수역 철도공무원, 1948년 10월 24일 진압군에 의해 총살, 당시 집에서 부르는 이름 순채), 황순경의 고종사촌 오성재(당시 21세, 광무동 굴 껍질 가공 시멘트 제조 공장 근무, 진압군에 의해 1948년 10월 24일 총살), 황순경의 외삼촌 우종현(당시 25세, 순천경찰서 경찰, 14연대군에 의해 사살)

 

그때 제게 닥친 일을 저는 잘 압니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떠올릴 수 있는 유년의 기억 중에는 참 알 수 없는 순간들의 것일 때도 있습니다. 따뜻한 햇살이 들던 마루에서 라디오를 듣던 기억, 친구들과 함께 놀다 돌연 이상한 기분이 들며 자신이 성큼 크는 것이 느껴지던 때, 바닥에 흩어지던 과자들의 색깔과 함께 무언지 서글픔으로 다가오던 순간들, 점점 커지는 빛덩어리에 눌리던 악몽들……. 도무지 맥락도 없고, 왜 그토록 각인되어 잊히지 않는 순간으로 고정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억들은 그런 것들과는 다릅니다. 생생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나는 그때는 알 수 없었던 선명한 이야기의 뿌리줄기를 하나씩 캐가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줄기 끝에 딸려오는 기억의 단편들은 생각보다 처참하거나 혹은 거대한 파도가 덮치듯 밀려와 숨을 쉴 수 없게 합니다. 그러니 정확히 유년의 기억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9살의 한 지점에서의 기억은 19살, 39살, 69살, 나이가 더해지는 동안 그 고통의 진폭을 넓혀가며 동심원을 그려 현재 삶의 중심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네? 고통의 기억이라는 것을 증언하려는 것치고는 제 눈빛이 빛난다구요? 목소리에 생기가 가득하다구요? 맞습니다. 저는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니까요. 그 기억들 한 장면 한 장면에 이름을 따복따복 붙여서 설명해 갈 테니까요.

내 삶을 덮쳐왔던 기억들, 그것이 명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안개처럼 온몸을 축축하게 적시는 그 장면들에 저는 말이라는 명확하고 분명한 빛을 쪼여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나는 이미 여러 번의 이 기억의 말하기를 통해 그 희뿌연 것들에 적절한 말의 옷을 입히는 행위가 점차 두려움을 빛바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거든요. 그러니까 내게 이 증언은 잊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당당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점점 더 생생해집니다.

1948년 10월 19일에 사건이 터지고, 여수에 진압군이 입성한 첫날인 10월 24일, 음력으로는 9월 22일이었습니다. 이 음력 9월 22일은 우리 형님의 제삿날이고, 우리 고종사촌 형님의 제삿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흘 전이 우리 외삼촌의 기일입니다. 우리 집안에만 세 분의 제사가 있으니 우리 말고도 이 근방에는 이날들을 전후로 제수를 장만하느라 분주한 이들이 꽤 있지요. 그런 가을밤이면 어느 골목을 지나든 떠다니는 향내가 온몸에 배는 듯합니다.

외삼촌은 경찰서로 출근하자마자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태 속에 내려진 명령을 수행하다가 14연대 군인들에게 당해 돌아가셨고, 우리 형님은 하루를 마치고 어둑해지는 철길을 따라 퇴근하다가 작전에 실패해 잔뜩 독이 오른 진압군인들의 총부리에 젊음의 한가운데에서 요절하였으며, 고종사촌 형님은 갯것의 비린내와 땀 냄새가 한껏 밴 몸으로 젊은 아내와 어린 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국가가 쏜 총에 맞았습니다.

각각의 다른 편들의 총부리가 겨눠진 상태에서 왜 당신들이 죽어야 하는지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총을 겨눈 이들도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겠지요. 머리카락이 긴지 짧은지부터 손에 기름때가 묻었는지, 새 신을 신었는지 딱 보아 구분해냈겠지요. 그리고서 고쟁이만 남기고 겉옷을 벗기고 손을 들라고, 들었던 손을 깍지 끼어 뒷머리에 붙이라며 총을 겨누며 몰아댔겠지요.

그 간단한 눈길과 명령만으로 발가벗겨진 이들은 반역을 한 군인이 되고, 인민위원회가 몰수해서 나눠준 것을 받은 반동이 되어 손가락질 당하며 제거되어야 할 적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유를 물을 틈도 주지 않으며, 사정을 말해 볼 도리도 없게 너무나 당연하게 정해진 수순처럼 닥친 일들. 그들 개인의 인생 맥락에서는 도무지 이유가 없는 불행이었습니다.

이 이유 없는 불행을 9살, 국민학교 2학년 소년으로 목격했습니다. 엉엉 많이 울었고, 많이 견디며, 어머니의 슬픔마저 감당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9살의 나날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좀 더 제대로 말하자면 그 생생함은 슬픔에 대한 것보다 죽음의 형상에 대한 것입니다. 내 기억에 가장 생생하게 각인된 것은 우리 형님 황순채(호적 이름은 순헌, 당시 집에서 부르던 이름 순채) 형의 죽음입니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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