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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그 전쟁처럼문학칼럼 41 - 윤흥길, 소설 <장마>(1973),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1979)
문학박사 송은정 작가

혐오와 증오의 감정이 저 무거운 먹구름 혹은 질펀하게 적시는 장맛비처럼 지구촌을 어둡게 하고 있는 요즘이다. 코로나19라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서로를 향해 숨겨두었던 이를 드러내게 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것보다 적으로 몰아갈 가시적인 무언가를 설정해 분노를 분출하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흑인이나 무슬림, 동아시아인이나 중국 사람을, 우한시나 대구 또는 신천지나 특정 종교를, 이태원 클럽이나 확진자가 들렀다는 모든 장소를 불결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지금의 여기와 나는 안전하다는 걸 증명하게 된다고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게 전세계로 확산된 바이러스에 똑같이 노출될 수 있다는 불안보다는 그것이 더 견딜만한지 모른다.

무언가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 언젠가는 당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그것만으로도 인간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힘을 지닌다. 그리스신화 속 영웅 페르세우스의 할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나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가 신탁을 받고 그것이 실현될까봐 초조해하며 지레 스스로의 파국을 초래한 것처럼. 물레바늘에 찔려 죽을 거라는 저주가 그랬듯이 대적해야 하는 적은 그 저주를 퍼부었던 마녀나 그런 운명을 정한 신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인간은 벽을 쌓고 물레를 불태우거나, 그 가련한 운명의 당사자를 감금하여 고립시키거나 심지어는 제거하려는 오류를 범해 결국 파멸을 자처했다.

지금 우리가 불결한 것과의 거리를 확보하며 위생이나 청결 의지를 다지는 것은 건강한 삶을 추구하려는 사유여야 할 터이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조급함에 곳곳에 처형의 올가미를 걸어두며 희생자를 몰색하고 있다.

신탁은 공포와 초조함에서 기인해 혐오와 증오의 과정을 거쳐 파국으로 완성된다. 그것이 집단적인 현상으로 발현된 것이 전쟁일 것이다.

광복은 일제 치하 36년의 치욕을 극복하고 빠른 시기에 근대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했다. 시급한 과업은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와 사유를 방해하는, 불행한 운명을 예언하는 신탁처럼 작용했다. 혼란과 불안의 시기에 가진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누군가가 권력을 선점해 버릴 것이라는 조급증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 당장의 유일해 보이는 지름길은 폭력을 동반한 방식이었고, 결국 폭력은 전쟁으로 폭발했다. 70년 전 발발한 한국전쟁은 신탁을 받은 이들이 그랬듯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같은 동족을 빨갱이와 반동분자라로 가시화하고 혐오와 증오를 원동력 삼아서 서로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를 던졌다.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잠깐의 소강상태일 뿐인 장마의 시기에 머물러 있다. 분단된 한반도는 윤흥길의 소설 <장마>의 마지막 문장처럼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라고 종지부를 찍고,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처럼 맑게 개어가는 하늘에 뜬 무지개를 목격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윤흥길(尹興吉, 1942년 ~, 전라북도 정읍 출생)의 두 소설은 한국전쟁을 다룬 중편과 단편이다. 작가 윤흥길이 전쟁을 체험한 나이였을 8살 아이 동만을 서술자로 한 두 소설은 연도의 차이를 두고 발표되었지만 서사는 서로 이어져 있다. 동만의 집에는 할머니 뿐 아니라, 외할머니와 이모가 피난 와서 같이 살고 있다. 외할머니의 아들, 운동도 잘하던 엘리트 외삼촌은 국군 소위로 전쟁터에 나가 있고, 할머니의 아들인 치기를 지닌 삼촌은 빨치산이 되어 부재중이다.

장맛비가 매섭던 밤 철퍽철퍽 물웅덩이를 밟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외할머니의 잘난 아들이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외할머니는 그날 아침부터 주문처럼 “내 말이 틀리능가 봐라. 인제 쪼매만 있으면 모다 알게 될 것이다. 어디 내 말이 맞능가 틀리능가 봐라.” 라는 말을 웅얼대고 있었다. “위아래를 통틀어 겨우 일곱 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무쇠로 만든 커다란 족집게가 입 안으로 쑥 들어오더니 기중 실하게 붙어 있던 이빨 하나를 우지끈 잦뜨려 놓고 달아나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그 꿈이 실현되면서 외할머니는 빨갱이라는 사돈 총각을 저주하며 할머니와 대립하게 된다. 금기어인 빨갱이를 말한 것에 놀라 움츠러든 외할머니는 서술자 동만과 같은 죄인 신세가 된다. 동만이는 초콜릿의 유혹에 못이겨 며칠 전 집에 몰래 찾아온 빨치산 삼촌의 행적을 발설했고, 외할머니는 그 삼촌이 제대로 요기도 못하고 집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든, 그 밤의 부주의한 인기척을 낸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고도 죄인처럼 지내는 외할머니와 자식이 빨갱이라는, 생명이 위태로운 존재라는 생각에 초조해하는 할머니는 서로를 용서하기 어렵다. 외할머니가 꿈에 사로잡혀 초조해했듯 할머니는 소경 점쟁이가 점쳐준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아무 날 아무 시’를 기다리며 또 다른 초조함을 키운다. 식구들에게 점괘를 신앙처럼 믿기를 강요한다. 그러나 아무 날 아무시에 집을 찾은 건 아이들에게 쫓기던 커다란 구렁이였다. 돌팔매질 당하는 혐오의 대상인 구렁이는 아들이자, 빨갱이의 현현이었다.

결국 두 노파는 꿈과 점괘대로 아들을 잃었다. 할머니는 간절함과 기다림의 초조함에 이기지 못해 생명을 지탱하지 못했다.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에서도 전쟁과 장마는 계속된다. 젖먹이 갓난아이를 포함한 가족을 모두 잃은 동만의 당숙모는 그 빗속을 떠도는 미친년이 되었다.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리던 해발 800미터 산 아래 마을은 밤과 낮의 세상 주인이 바뀌는 곳이었다. 당숙모는 밤중 설사로 변소에 있다가 산을 내려온 빨치산들에 의해 가족들이 불태워지는 것을 목격했다. 똥통에 숨어 있다 살아난 당숙모는 퉁퉁 불은 젖가슴을 안고 떠돌았다. 그러다 빨치산에 대한 보복으로 솔뫼마을의 한 가족이 핏덩이 아이 하나만 남고 몰살당한다. 미친 당숙모는 그 살아난 아이를 낫을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지켜내고 키운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빨갱이 측 집안의 아이를.

똥멱이 아들이라 불린 동근이는 당숙모의 처절한 노력으로 동만이네 가문 호적에도 올랐다. 동근이는 키워준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했고, 어머니를 잃고 어린 나이에 집안의 괄시를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났다. 그리고 소설은 그 동근이 사법고시에 합격해 긴 장마가 끝나면 무지개가 뜬다는 것을 증명하듯 고향으로 돌아온다.

두 소설은 빨갱이, 국가의 적이라는 가시화된 적으로 낙인된 희생자들을 구렁이나 똥멱이 같은 혐오스러운 존재로 치부하는 시각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공포스러운 대상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운명을 가정한 신탁에 대한 초조함이 폭력적으로 분출되면서 가장 연약하고, 소외된 이들이 희생된다.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소설책을 덮고, 잠에 빠져들다 소스라쳐 놀라 작은 비명을 질렀다. 비에 젖어 연약해진 지반 아래 비트에서 누군가가 날 지켜보고 있었다. 죽을 것이라는, 사랑받지 못하거나 떠날 것이라는, 빼앗길 것이라는 인간의 가장 연약한 지반 아래서 초조함은 불쑥불쑥 덩치를 키우며 우리 마음을 허물고 있을지 모른다.

비대면의 방식이 최선인 것처럼 여겨지는 코로나 시국에 남북한 역시 영원한 비대면만이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잘 될 것이라는, 꼭 만날 거라는 믿음으로 서로 손을 붙잡을 방법을 천천히 사유할 수 있는 시기이기를. (2020, 6. 30)

데스크  yeosunews@da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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