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뒤 아시가 국가로는 가장 먼저 한국과 정상회담을 갖고 동맹관계를 더욱 심화하기로 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부시 대통령은 한국의 대북정책을 지지했고 남북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김 대통령의 주도적 역할도 지지했다. 이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한 방문을 앞둔 시점에서 한미동맹의 기초 위에 남북평화 과정을 제도화하기 위해서 매우 적절한 제후이다.
그러면서도 부시 대통령을 북한에 대해서는 자기의 솔직한 의견을 토로했다. 그는 북한 지도층의 의도에 대하여 회의적이며 따라서 그들과의 협상에는 확실한 검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시 신정부는 당장 북한과 협상을 할 계획이 없으며 아직도 북한을 위협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이처럼 북한 체제의 본질과 의도를 안보팀은 불신하고 있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따라서 미국은 현재 재검토하고 있는 대북정책에서 투명성과 상호주의의 관철을 중시하고 있다.
부시 신정부가 왜 이와 같은 시각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심사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부시팀은 냉정 종식 이후 유일한 초강국으로서 미국이 범세계적 핵 및 미사일 비확산을 최우선 외교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1월 20일 취임 이후 대외정책이 좌충우돌하고 있다. 러시아와는 대규모 외교관 추방사태로, 중국과는 대만에 대한 이지스급 구축함 판매로 긴장이 높아가고 있던 차에 4월 1일 미·중 군용기 충돌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러시아의 중동에 대한 무기 판매를 거듭 경고하는가 하면 러시아가 테러 주범으로 간주하는 체첸 특사를 공식 접견할 태세를 보임으로써 러시아를 자극하고 있다.
첸치천 중국 부총리와의 최근 회담에서 이지스급 구축함을 대만에 판매할 경우 대만에 대한 군사 공격도 불사하겠다는 중국의 거듭된 경고에도 “그것은 미국이 결정할 일”이라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아킬레스건’인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아시의 우방국인 한국, 일본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부시 대통령은 외교적인 관행을 넘어선 직설적인 어법을 구사하면서 미국의 국익을 우선하는 입장을 강조했다. 햇볕정책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원했던 김대중 대통령과 일본 경제 활성화를 위해 엔화 약세에 대한 미국의 용인을 바랬던 모리 요시로 일본총리에게 시원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취임 직후에는 이라크를 전격 공습하더니 북한과 미사일 협상 재개를 거부하고 교도(京都)이정서 폐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함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나아가 중동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상대적 홀대와 이란,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강경한 입장 때문에 아랍권의 미국에 대한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첫정상회담을 가진 멕시코와 캐나다 유럽 국가들과는 상대적으로 보조를 잘 맞춰 나가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미국이 강력 추진하고 있는 국가미사일 방어(NMD) 계획에 반대하던 유럽국가들이 독일을 비롯해 속속 ‘검토 가능’ 입장으로 후퇴하고 있는 대목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부시 외교의 강공 드라이브는 ‘원칙에 입각한 리더쉽’ ‘힘을 통한 평화 유지’라는 외교구상을 구체화한 것이다.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공화당의 일방주의(unilatcralism) 외교전통이다. 상대방에 구애받지 않고 미국의 입장에서 국제정세를 판단하고 미국의 필요에 따라 행동하는 외교다. 이에 비해 민주당의 외교는 다자주의(multilateralism)에 입각한 개입주의를 특징으로 하고있다. 물론 양자 모두 세계적 패권 확립이라는 기본 목표에는 이견이 없다.
공화당 외교의 성과가 극적으로 나타났던 것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막대한 군사비를 투입하는 군사적 일방주의로 마침내 소련을 무너뜨렸다.
‘한미 공조체제’를 공고히 한 바탕 위에서 부시 행정부를 설득해야 한다는 말이 많이 들린다. 그러나 ‘한미 공조체제’가 진정한 의미에서 ‘공조체제’가 되기 위해서는 한미 사이에 주종(主從) 관계가 아니라 상호 평등한 관계가 우선 설정되어야 한다. 국가 미사일 방어가 또다시 군비 경쟁을 촉발하기 때문에(이미 중국은 금년도 방위비 예산을 18%나 증액시켰다) 이를 반대한다는 유럽 연합의 외무상들은 워싱턴에서 발언할 수 있는 데 우리는 할 수 없다는 태도로는 ‘6·15 남북공동선언’이 담고 있는 휼륭한 정신을 결코 살릴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전과 한미정상회담 이후의 김대통령의 발언에서 많은 차이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대미정보수집과 분석능력의 결함으로 인한 것인가, 아니면 자료를 접하는 지도층의 자질 문제인가, 이질적 분석과 평가능력의 부재가 가져온 회담 준비의 오판과 안이한 판단의 결과라 할 것이다.
우리는 미국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너무나도 무비판적이며, 미국의 옳지 않은 정책에 대해서는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국민과 정부가 되지 않고서는 반세기에 걸쳐 우리를 옥죈 민족분단과 갈등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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