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ㆍ특집 기획
“젊은 남자들을 M1소총으로 직접 총살 시신이 바다로 떨어진 것을 직접 목격”<여수신문 창간 28주년 특별기고- 송은정 작가>

남면 연도초서 반군협조자 지목 청년 5명 한 사람씩 끌어내려 총살 2~3발 확인 사살도

안도에서 주민들 집단적 총살, 일부 사병들 지휘관 김종원 무자비한 만행에 저항도

덕촌리와 서도리 등의 젊은이들이 약 120명 진압군에 인계돼 즉결 처형 등 수감생활

송은정 작가(문학박사)

돛단배나 통통배로나 오가야 하는 푸른 바다 저 너머의 섬들. 누군가는 그 바다 건너에 있는 줄도 몰랐던 섬. 인편 아니고선 소식 전할 길이 없던 섬마을에도 74년 전 여수를 뒤덮은 공포와 죽음의 소식이 전해졌을까? 그곳에는 광란의 폭력이 풀어놓은 피비린내가 흘러들지 않았을까?

불행하게도 그곳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가막만, 해창만, 벌교, 조성 뻘밭 끝에서 시작된 마을과 지리산과 백운산 자락 인근 산골 마을까지 어느 한 곳 빠지지 않고 덮쳤던 죽음과 공포의 그림자는 시퍼런 바다를 덮으며 먼 섬에도 이르렀다.

여수에서 남면 연도까지는 37.8Km 떨어져 있고, 해상으로 114.7km가 떨어진 곳에는 거문도로 대표되는 삼산면이 있다. 삼산면 거문리는 1960년대까지 여객선으로 여수에서 배를 타고 9시간을 항해해야 도착하는 먼바다에 위치한 섬이다. 이 먼 뱃길을 마다하지 않고, 총칼을 차고 민중들을 잡겠다고 함정까지 몰고 군인들이 들이닥쳤던 74년 전 여순사건.

1기 진실화해위원회와 개별적인 증언 채록을 통한 남면과 삼산면의 희생 사건 몇 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여천군 남면

김종원이 지휘하는 국군 제5연대 소속 군인들이 1949년 10월 29일, 새벽 5시경 군함을 이용하여 남면 연도에 들어왔다. 군인들은 14연대 입대자의 집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국군들은 안 나오면 쏴 버린다고 고함을 지르면서 위협하여 주민들을 연도초등학교에 집결시켰다. 모인 주민들은 모두 무서워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국군들은 연도초등학교 급사인 김00(19세)에게 반군 협조자 지목을 강요했다. 지목받은 청년 5명을 한 사람씩 끌어내어 연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바로 총살했다. 군인들은 확인 사살을 위해 2~3발씩 총을 쏘았다.

5연대 소속 군인들이 연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주민들을 총살하자, 이튿날인 1949년 10월 30일, 역포마을 청년 4명은 두려움에 인근 신광굴로 피신했다가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진압군이 타고 온 동일호에 실렸다. 이후 군인들은 이들을 여수 외곽에서 총살했다.

국군 5연대 1대대 연도 북쪽에 있는 안도에서도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총살했다. 3척의 배에 분승하여 연도를 떠난 국군 5연대 1대대는 1948년 11월 1일 오전, 안도 앞에 당도했다.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5호 (사진 송은정 작가 제공)

안도 사건에 대해 당시 여수경찰서 경찰로 김종원과 친분이 있던 참고인 신○○이 했던 진술이다.

“한번은 암호를 전달하러 여수여중에 갔는데, 김종원이 여수경찰서 경비정 갈매기호를 타고 바람 쐬러 가자고 하여 같이 갔어요. 남면 안도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안도에 도착하니 안도 주민들이 환영한다고 하는데, 당시 안도 주민들의 모임 중에 좌우에 관계 없는 치안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종원은 좌익에만 치안대가 있는 줄 알고, 배가 닿은 선착장 제방에서 젊은 남자 10~11명을 M1 소총으로 직접 총살하여 시신들이 바다로 떨어지는 것을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총살당한 안도 주민들은 좌익이나 반군 협조 행위자가 아니었습니다.”

참고인 신○○은 또, “총살이 벌어지자 안도 주민들은 놀라서 울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못했다”며, “도착 후 총살까지 한 시간이 안 걸렸다”고 덧붙였다.

안도 축항 선착장에 배를 정박시킨 군인들은 마을로 들어가 14연대 입대자 2명의 집에 불을 지르는 한편, 공포탄을 쏘며 집안에 있던 주민들을 안도국민학교로 집결시켰다.

150여 명의 주민들이 두려움에 떨며 모여 들었다. 이후 군인들은 집결한 주민들 가운데 젊은이들을 따로 분류했다. 이에 마을청년 이00(남, 19)이 무고한 이들을 끌고 간다며 항의했다가 그 자리에서 결국 사살되었다.

5연대 1대대는 남은 40여 명을 3열종대로 줄 세워 안도 축항 선착장으로 연행했다. 학교에 남은 이들에겐 30분 뒤 해산하라 명령했다. 이후 선착장에 도착한 5연대 1대대는 연행된 청년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좌익 가담 여부를 추궁했다. 그날 10명의 젊은이가 죽임을 당했다

5연대 1대대 정보과 출신으로 당시 현장에 있었던 참고인 김○○은 “총살 지시를 받은 하사가 긴장하여 총살을 못하자, 김종원이 네가 군인이냐, 저들은 너희 가족을 죽였는데 원수를 갚지도 못하느냐”며, “M1 소총으로 머리를 내리쳤다”고 진술했고, “사병에게 총살을 시켰는데 (중략) 하지 못하면 그 사병을 구타한 후 김종원 본인이 직접 총살을 했다”라고 회고했다.

안도 축항 사건에서 일부 사병들은 지휘관 김종원의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반군 협력자 색출에 반발해, 명령이행을 하지 않거나, 민간인들을 풀어주는 등의 방법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한 증언자는 남면에 김종원을 불러들이지만 않았어도 이다지 피해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김종원을 불러들인 것은 어업 주도권을 취하고자 했다가 마을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앙심을 품었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여천군 삼산면

1948년 10월 말에 삼산면 젊은이들은 육지의 난리 소식에 두려워 청년들이 숨어지냈다. 그런데 해군 함정 두만강호가 삼산면 거문항으로 입항했다. 두만강호 선장 해군장교 이00는 삼산면 초도리 출신으로 서도의 거문초등학교 졸업생으로 그 섬마을에 산 적이 있었고, 동문들도 있었으며, 그의 누나가 그 마을에 살고 있기도 했다. 선장은 확성기를 대고 자신이 몇 회 졸업생이니 자신을 믿고 같이 가면 다 좋게 해주겠다며 마을 주민들을 이끌어냈다.

주민들은 그를 믿고, 걱정 없이 자발적으로 배에 탔다. 덕촌리와 서도리 등의 젊은이들이 약 120명이 배에 실려 여수 진압군에게 인계되었다. 이들은 몇몇이 풀려나기도 했으나 많은 수가 즉결처형되거나 만성리 등에서 학살되고, 군법회의에서 형을 언도 받아 수감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해 형무소재소자학살로 희생되었다. 

여순사건 당시 도서지역 주민들의 희생을 다룬 글이 여수신문 창간 28주년 기념호에 실렸다.

데스크  yeosunews@daum.net

<저작권자 © 여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