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이다. 그러나 꽹과리 소리가 들려와야 할 농촌에서는 한숨소리만 들려온다.

농가부채가 가구당 이미 2천만원을 넘어서고 그 풍년으로 쌀값이 또 곤두박질을 친다. 묵은 쌀이 산더미처럼 쌓여 내다 팔 곳도 저장할 창고도 없다.

어촌에서도 한숨이다. 적조가 온 바다를 뒤덮고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설상 가상으로 콜레라까지 번져 어민들과 생선횟집들이 더욱 울상이다.

여느 해처럼 인도에서는 코스모스가 흐늘거리고 밤이면 귀뚜라미가 청승을 떤다. 그런 가을 밤하늘은 별이 적어 쓸쓸한 계절의 감회를 더욱 깊게 하고 큰별자리 북동쪽 두 줄기 별들은 수난의 왕녀 안드로메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공주)가 누운 모습이다.

그래서 일까. 문득 지금쯤 미국 어느 병실에 누워 있을 여수항 K언니 얼굴이 떠오른다. 원수놈의 돈 때문에 진작 큰 병원으로 달려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뒤늦게 제자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K언니의 쾌유를 빈다.

우리는 종종 부지불식간에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K언니도 예외일 수는 없고 아마 그 여행지의 십중 팔구는 발바닥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 여수항이 아닐까. 여우가 죽을 때도 머리를 제가 살던 굴쪽으로 두거늘 항차 사람이야 더 일러 무엇하랴.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 천년 만년 살 것 같아도 눈 깜짝할 순간이다. 그런데도 쥐고 가지도 못할 것들을 위해 눈알을 부라리며 아득바득 발버둥을 친다.

사람은 세월로 오래 살지 않고 어떻게 살았느냐로 오래 산다. 그래서 영원히 살기 위해 순간으로 죽기도 하고 순간을 살기 위해 영원히 죽기도 한다. K언니의 감회는 어떤 것일까.

우리 나라 남부지방의 가을은 여름철에 북상한 제트기류의 남하와 함께 가을장마로 온다. 9월로 접어들면 간간이 비를 뿌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을은 늘상 앉지도 않고 선걸음으로 그냥 지나쳐 우리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한다.

여름 내내 수직으로 떠오르던 구름들이 둥실둥실 수평으로 떠내려 간다. 우리들이 가을 구름의 옆으로 흐름에서 좌우를 돌아보고 방향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높은 가지는 부러지기 쉽다.

가로수 은행잎들이 가을바람에 팔랑거린다. 대저 이 가을은 무엇으로 오는가. 가을은 한숨과 미움과 거짓을 날려보내는 바람으로 와야 한다.

우리는 밤하늘의 은하수가 북동쪽 지평선에서 남서쪽 지평선으로 하늘을 한 바퀴 돌듯 이 가을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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